배화여중 설립자 캠벨 여사 묘역 참배
지난 11월 19일 배화학원은 창립 116주년을 맞아 배화학원 설립자인 죠세핀 필 캠벨(Campbell, Josephine Eaton Peel, 姜慕仁, 1853-1920) 여사의 묘가 있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을 찾아 성묘를 했다. 배화여대, 배화여고, 배화여중, 배화유치원 등 4개 기관 대표와 목사님 그리고 학생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하이얀 국화꽃 한 바구니를 봉화했다.
양화진 묘역에 참배하기에 앞서 종교교회에서 추도 예배를 드렸다. 종교교회는 자교교회와 더불어 배화여중고와 대학의 모태가 되는 교회로서 가족과 같은 교회로서 평소 배화여중고의 교육을 많이 돕고 있다.
캠벨여사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
캠벨 여사는 미국 남 감리회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선교사로 내한하여 배화학원과 종교교회, 자교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853년 4월 1일 미국 텍사스에서 출생하여, 21세 되던 1874년 조셉 캠벨(Joseph Campbell)목사와 결혼하여 1남 1여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1880년 남편 캠벨 목사와 사별하고, 자녀들도 수년 내 모두 잃었다.
이 같은 불행을 격은 그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자신의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며 “一生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貢獻하기로 결심하고” 시카고의 간호원 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해외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886년 미국 남 감리회 해외 선교사로 선임되어 중국의 상해 소주(蘇州) 등지에서 10여 년 간 봉직했다.
캠벨 선교사는 그 후 미국 ‘남감리회 해외 여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에서 한국에 파송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1897년 10월 9일 서울에 도착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5세였으며, 한국으로 오면서 중국인 양녀(養女) 여도라(Dora Yui, 余小姐)를 데리고 왔다. 여도라는 한국에서 간호사로, 교사로, 전도자 등으로 활동하면서 캠벨의 선교사업을 훌륭하게 조력했다.
한국에 도착한 캠벨 선교사는 윤치호의 마중을 받았으며 남대문 근처의 남송현(南松峴) 선교부에 정착했다. 이 지역은 리드(李德) 선교사 부부가 이미 훌륭하게 선교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감리회의 상동병원과 북장로회의 제중원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고자 했다.
그녀는 1898년 8월 1일 ‘고가나무골’(漢城府 仁達坊 古磵洞, 지금의 내자동으로 주로 내시들이 살던 곳) 이항복의 집터로 선교지를 옮겨 본격적으로 여성 기숙학교(Boarding School)를 육성했다. 이것이 1898년 10월 2일 남감리회의 대표적 여학교 ‘배화학당’ 창설이다. 처음 이름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어린이 헌금이 일부 쓰여졌기 때문에 “캘롤라이나 학당(Carolina Institute)”이라 했다.
이때 교사(敎師)는 2명이었고, 과목(科目)은 한글과 한문이었다. 학생은 6명으로 첫 학생은 선교사 사택 수위였던 박씨의 딸이었다. 다른 학생은 캠벨이 순회 전도하며 데려온 아이들이다. 초기 수업 때 캠벨은 영어로 밖에 말할 수 없어 손짓, 발짓, 무언극으로 표현했다.
이 같은 교육은 춤을 추듯한다하여 “발레 수업”이라 했다. 그 후 5년 뒤인 1903년 12월 ‘배화학당’이 되었으며 교육과정은 산술, 독본, 생리학, 지리, 역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배화(培花)란 “꽃을 기른다”는 뜻이며, 기 이름은 윤치호 선생이 지었다. 배화학당(培花學堂)이란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을 의미했다. 그 후 배화학당은 1909년 배화여학교로 인가를 얻어 졸업생을 정기적으로 배출했다. 캠벨 선교사는 1898년부터 1912년까지 15년간 초대 교장으로 봉직했다.
한편 그는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에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01년 배화학당 안에 미국에서 루이스 워커(Lousie Walker)가 보내준 돈으로 예배당을 건축하고, ‘루이스 워커 기념 예배당(Chapel)’이라 했다. 이곳에서 시작된 예배 모임이 오늘날의 종교교회와 자교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정춘추 전도사와 홍다비다 전도부인 중심의 신앙 공동체가 이전(移轉)하여 종교(宗橋)교회가 되었다. 그리고 윤상은 전도인 중심의 루이스 워커 기념예배당 잔류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자교(紫橋)교회로 발전했다고 한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 교육 사업과 병행하여 전도부인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도부인 양성사업도 주력했다.
그의 생애와 신앙의 특징은 첫째,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체험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를 두었다. 둘째,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 중심”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철저한 기도와, 큰 이상과 포부를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며 실행했다. 넷째, 과거와 현재, 근대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조화를 추구하며 한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선교활동을 했다.
1918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다가 이듬해 되돌아오려고 준비 중 신병을 얻었다. 주위 친지들은 병이 회복된 뒤에 여행을 권유했으나 1919년 8월 무리하게 한국으로 돌아와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11월 12일 별세했다. 장례식은 1920년 11월 15일 배화학당장으로 거행되었다. 양화진 제1묘역(나-7)에 안장되었으며, 비문에는 '내가 조선에서 헌신하였으니 죽어도 조선에서 죽는 것이 마땅하다'라 기록되었다.
(참고자료: 배화백년사, 감리교 인물사전, 종교-자교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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