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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랫말 아이들 본문 보기

원 시 인 2010. 9. 2. 21:50

모랫말 아이들

 

 

# 줄거리

이 책은 어린 수남이를 화자로 내세워 6·25 전쟁 이후 모랫말에 사는 주변 인물들의 삶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책의 배경은 전쟁 직후로 많은 사람들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이 주인공은 그러한 하층민들의 삶을 순수하고 밝게 그려내고 있다. 모랫말의 사람들은 모두 소외된 인물들로서 그들의 삶을 통해 산업화 사회의 모순과 상처를 준엄히 비판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우리 자신의 성찰을 유도한다.

 

이 책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강둑 갈대밭에 움막을 짓고 살았던 꼼배가 처음으로 나온다. 꼼배는 거지처럼 살아가지만 마음만은 착한 순진한 사람이다. 마을 아이들에게까지 놀림을 받을 정도로 어눌하기도 하지만 꼼배는 결국 마누라까지 얻고 아이까지 낳아 잘 살아간다. 하지만 아이들이 놓은 쥐불에 아내와 갓난애를 잃고 만다. 다시 홀로 남겨진 꼼배는 그런 아이들을 질책하지 않은 채 어디론가 떠나려 하지만 떠나기 전에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마무리짓는다. 그것은 바로 모랫말을 위한 다리를 만드는 일이다. 꼼배는 홀로 그 다리를 완성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난다. 그 후로 그 다리는 '꼼배다리'로 불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

 

또 다른 이야기는 러시아 혼혈아 귀남이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엄마의 친구가 양공주로 떠나면서 맡긴 아이가 바로 귀남이 인데 수남이의 집에서 살면서 이야기도 잘 안하고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지낸다. 주인공 수남이는 어쩐지 그 아이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잘해주지만 귀남이는 수남이네 집에서 적응을 하지 못한다. 결국 귀남이는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떠나는 마지막날 수남이 에게 '금단추'를 하나 쥐어준다. 그 금단추는 귀남이의 하나뿐인 보물인 듯 했지만 자신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베풀어준 사람에게 보답을 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자신도 어렵지만 그런 따뜻함에 보답하는 마음을 참 아름답게 그려냈다. 금단추는 은혜에 대한 보답을 따뜻하게 갚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는 꼼배, 러시아 혼혈아 귀남이, 양공주 딸인 같은 반 학생 영화, 식모누나 태금이, 서커스단의 남매 등의 등장인물이 제각기 다른 이야기로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이야기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아무래도 전쟁이 남긴 것인데 전쟁 직후의 참담한 현실이나 잘못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그러한 극적인 상황에 의해서 더욱 더 큰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또 하나의 특징은 글 중간 중간에 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었는데 책 이야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그림들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면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도 있었고 토속적이고 자연스러움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 지기까지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꿋꿋하고 밝게 살아가는 모랫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따뜻해지고 무엇인가로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모랫말을 보면서 깨끗하면서 따뜻함이 흐르는 세상이 바로 이곳이구나 하고 느꼈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삭막한 도시를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만들고 싶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또한 등장인물들처럼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잘 이겨나고 항상 밝고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훈훈해지는 책을 많이 읽고 싶다.

 

# 작품 전문 읽기

 

 멀리 비행장에서 시동을 거는 프로펠러 소리로 모랫말의 겨울 아침은 시작된다.잠이 깨어 코까지 둘러썼던 이불 사이로 내다보면, 제일 먼저 성에가 두텁게 낀 유리창이 마주 보였다. 여름에 누나들이 창살에 실을 매주어 타고 오르던 나팔꽃은 시들어 말라버려 바람에 불려서 날아가고, 창문마다 예리한 얼음의 꽃이 매달렸다. 비스듬히 쏟아지는 아침 햇볕에 창문의 귀퉁이가 녹아내리면서 작은 얼음의 입자들은 무수한 빛 조각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어린이 잡지에서 숨은 그림을 찾을 때처럼, 우리는 유리창 위에서 갖가지 동물과 수풀을 보았다. 어느 때는 깊은 바다에서 자라는 음산하고 아름다운 물풀이 가득 피었고, 그 사이의 허공 위에서 뿔 돋친 고기들이 날아다녔다.겨울날의 모랫말 동네를 떠올리면 비행기가 엔진을 데우느라고 시동을 거는 소리, 두터운 성에의 그림, 만두 파는 소년, 배추 꼬리, 양지쪽에서 머리의 서캐를 잡는 모녀들, 코크스 줍는 아이들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른풀에 질러놓던 쥐불놀이로 겨울 풍경이 완전해진다.쥐불은 어디에 놓다. 둑 밑 갈대밭에 놓지. 둑 밑 갈대밭에는 춘근이네 움막이 있었고 그 아래 얼어붙은 샛강이 지나갔다.춘근이는 먼 데서 혼자 흘러들어온 거지였는데 어른들은 그를 땅끈이라거나 혹은 각설이라고 불렀고 흔히 땅그지 춘근이로 통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에게 꼼배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의 오른쪽 팔목이 호미처럼 구부러졌기 때문이었다."팔은 곰배팔, 그지는 땅그지, 애비는 배암이……."아이들이 놀려대면 그는 늘 갖고 다니는 갈고리 달린 지팡이를 휘두르며 쫓아오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은 문둥이나 만난 듯 흩어져 달아나고 춘근이는 커다란 입을 주욱 찢으며 힝, 웃고는 돌아섰다. 그렇지만 달아나는 아이들 중에 넘어지는 애가 있으면 쫓아가서 일으키고 흙 묻은 옷을 털어주곤 했다.춘근이가 우리 동네로 들어와서 아침마다 입바람과 발장단으로 찬밥을 구걸하거나 둑 밑의 강변 숲속에 뱀을 찾으러 헤매다니기 시작한 것은 두 해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마누라까지 거느리게 된 것은 "꼼배 다리"를 놓기 일 년 전의 봄이었다."꼼배가 장가갔다!""꼼배 마누라가 고목나무면, 꼼배는 매아미 꼴이라네."하는 얘기가 오고 갔다. 둑 너머 채소 시장 어귀에서 꼼배는 돈을 걷고 웬 뚱뚱한 여자가 노래를 부르는데 이난영이 뺨치게 하더라는 것이다. 과연 채소 시장 입구의 꼼배 부부는 우리 동네뿐만 아니라 다른 동네에서도 소문이 나서 어언 이 고장의 명물이 되어갔던 터였다.그네는 피난민 촌에 살던 함경도 여자인데 남편과 아이를 화재에 잃고 오갈 데가 없다가 꼼배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얘기다. 피난통에 굶주렸을 텐데 꼼배의 아낙은 다리 하나가 우리 한 아름드리는 되어 보였다."두고봐, 여편네 관상이 거지 노릇 할 상판이 아니란 말야. 제법 복이 붙었거든.""좌우간에 춘근이 녀석, 몽달 귀신을 면했으니 호박 잡았는걸."시장의 막벌이 일꾼들은 모여앉기만 하면 꼼배를 부러워했다. 꼼배는 제 아내의 곁에 히죽거리는 얼굴로 얌전히 서서 노래를 열중해서 듣고 있었다. 고개를 주억이며 박자를 맞추기도 했고 손뼉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네는 검정물 들인 헐렁한 군복 저고리에 누더기로 기운 담요 몸빼를 입고서 두 손을 얌전히 모은 채 노래를 불렀다. <목포의 눈물>이나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노래들이 그네가 즐기는 곡이었다. 작은 눈은 늘 웃음으로 잔주름투성이고 느슨하게 늘어진 볼따구니 사이의 작은 입은 참새 부리처럼 보였다. 전체적으로 꼭 화랑 건빵 같은 인상이었다.그들은 아침밥을 구걸하러 동냥을 올 적에도 꼭 같이 붙어다녔는데, 어느 날인가 우리집에 내려왔을 때엔 꼼배 혼자였다. 꼼배는 보통 거지처럼 밥 한술만 줍쇼오 하는 게 아니라 그 집 어린아이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그는 동네 아이들 이름을 거의 빠짐없이 외우고 있었다."수남아, 수남아!"갓 퍼놓은 밥을 들고 나가면서 어머니는 조금 짜증이 났던 게다."끼니 때나 지나서 오지…… 한창 바쁜 때에 원……."밥을 깡통에 넣어주고 돌아서던 어머니는 그제서야 꼼배가 혼자서 있음을 알았다."아니 마누라는 어쩌구 자네 혼자 왔나?""요즈음 그렇게 되었습니다.""어머나…… 도망갔나 봐?""실은 저…… 집사람이 만삭이라……."꼼배가 뒤통수를 긁적였다."애기를 가졌어, 몇 달짼데?""글쎄요, 저희가 뭘 아나요, 그저 통 기동을 못 허니까. 뚱뚱한 게 애까지 배구 누워 있습죠."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꼼배 처가 아이를 뱄다는 사실을 알았고, 요즈음 들어 몸이 더욱 불어난 게 아니라 만삭임이 밝혀졌던 것이다.날씨가 풀린 어느 포근한 오후에 밤섬서 통학하는 아이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한 시내를 건너다가 그만 얼음이 꺼져서 빠졌다. 아이들은 얼음 구멍에서 허우적거리는 친구를 끄집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중 생각 있는 아이가 꼼배네 움막으로 달려가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했다.그러나 꼼배는 집에 없었고 만삭이 된 그의 처가 몸져누워 있었다. 그네가 거북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밖으로 나왔을 때 물에 빠졌던 아이는 이미 자취가 보이질 않았다.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급류에 쓸려서 아래로 흘러내려갔을 것이다."그런 망할 놈 같으니…… 제가 동네 밥을 먹고 일가를 이룬 놈이 아이 하나 못 건지구 뭘 하는게야.""마누라 혼자 있었다는데 뭘 그래.""아따, 손만 잡아주면 살 것을…… 그런 밥버러지들은 당장에 동네에서 쫓아내버려야해."밤섬 사람들도 모랫말 사람들도 모두 꼼배네 움막이 천변에 있었으니 그의 책임은 면할 수가 없다고들 이야기하였다. 그 뒤부터 꼼배는 아침 구걸을 피하고 시장에만 나가고 있었는데 그의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동정심 많은 부인네들 몇이 미역을 사가지고 움막에 다녀왔다는 소문이 들렸다.그날, 나는 국원이와 함께 거기에 있었다. 내가 그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저 끔찍한 일이 일어나던 날을 말한다.우리는 포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마른 갈대밭에서 병정놀이를 하고 나서 들쥐 사냥을 벌이기로 했다. 들쥐의 구멍을 찾아내어 입구에다 마른풀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면 견디다 못한 들쥐 가족들이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불을 지르고는 기다리다가 한 마리씩 들쥐를 타격하는 재미가 기막힌 놀이였다. 그런데 어디서였을까, 미처 밟아서 완전히 꺼놓지 못한 곳에서 불길이 번져 위쪽의 갈대밭으로 옮겨붙게 되었다."야 불이 커지면 야단이다.""둑이 전부 타버려두 상관없어. 거름이 되어서 잔디가 더 잘 자라니까."아이들은 양편으로 갈라서서 번져가는 불길을 윗도리를 벗어서 두드리며 막아보려고 애를 썼다. 우리는 온통 땀과 재투성이가 되어서도 키들거리며 즐거워했다. 바싹 마른 갈대가 바지직거리며 듣기 좋은 소리를 내고 활활 타올랐다. 훨씬 먼 곳에 있는 꼼배네 움막에서 꼼배 처가 뛰어나왔다. 우리는 그네가 우리 바로 뒤에까지 달려온 것을 처음에는 보지 못했다.갑자기 째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다."불……불……불!"국원이가 웃으면서 소리쳤다."거기까진 안 가요. 밭터가 있잖아요.""불, 불…… 우리 애기, 애기."여자가 불붙는 갈대 위로 뒹굴기 시작했고 우리는 말릴 수도 없었다. 꼼배의 처가 꼭 미친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네는 불길이 잡힐 때까지 줄곧 뒹굴었다. 우리의 쥐불놀이는 꼼배 마누라 때문에 완전히 잡쳐버렸던 셈이다. 검게 타버린 검의 재 위에 그네는 큰 대자로 누워서 헐떡거렸다. 담요 몸빼가 누릿누릿하게 타 있었다.이틀 뒤에 그 여자는 시립병원까지 실려가서 죽어버렸다. 화상 때문에 피부 구멍이 모두 막혀서 그랬다는 소문이었다. 꼼배는 오랫동안 바깥출입을 않는 것 같았다. 어느 밤에 온 동네로 외치면서 다니는 그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야 이놈들아, 느이만 사람이냐, 느이만 사람이야?"갓난아이도 간 곳이 없었다. 아마도 강변 모래밭 어딘가에 묻었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는 그것 참 안되었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꼼배 처가 화재로 식구를 잃고 나서 충격을 지니고 살았는데, 불을 보자 그만 환장을 해버렸으니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라고들 말했다. 더구나 그들의 식구는 동네 사람 축에 끼지 못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혀를 차며 가여워하면서도 깊이 새겨두지는 않았다.그런데 그즈음부터 시냇가에 이상한 변화가 생겼으니 돌과 흙으로 쌓은 축대 비슷한 것이 한 군데씩 늘어가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그것은 다니 모양을 갖추었다. 드디어 봄이 오기 전에 시내 위에는 두 사람이 엇갈릴 만한 넓이의 근사한 다리가 생겨났다. 그맘때부터 어찌된 일인지 꼼배는 마을에서도 시장에서도 그의 움막에서도 보이지 않았다."허허, 춘근이가 밥값을 하구 갔군!"모랫말의 노인들은 그렇게 얘기했지만 사실은 그 다리를 볼 적마다 모두들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동네에서는 몇 해 동안 움막 앞으로 지나던 다리를 "꼼배 다리"라고 불렀고, 그 뒤에도 새로운 다리가 생기고 드디어는 미군 공병대가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를 놓았을 때까지 꼼배 다리라고 불렀다. 내가 자라서 키 큰 소년이 되었을 때까지 그 다리는 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었다.

금단추
비가 몹시 내리던 가을 저녁이었다.동네의 텃밭마다 가꾸어진 배추 속에 살이 찌고 뿌리가 굵어갈 무렵이었다. 가을에 내리는 비는 썰렁했고 더구나 밤에 지붕과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몹시 을씨년스러웠다.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인근 기지촌 동네의 양색시들에게서 주문받아온 옷을 만드느라고 밤 늦게까지 윗목 재봉틀 앞에 앉아 있었다. 누나들은 건넌방에서이미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문지기 아들 브레에스"라는 책에 열중해서 어머니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늦게까지 일어나 있었다."계세요. 계십니까?"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시 발틀 돌리기를 멈추었던 어머니가 잇따른 음성을 듣자 고개를 갸웃거렸다."이 시간에 누가……."그리고는 여러 가닥의 낙하산 천을 치우고 밖으로 나갔다. 브레에스가 주인집 아들에게 곤욕을 당하는 장면을 읽고 있던 참이었으나, 나도 책을 덮고 귀를 기울였다. 십구부대 앞의 양색시가 왔다면 귤이나 레이션이나 젤리 따위를 두툼한 종이 봉지에 싸가지고 왔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문간에서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누구시지요?""야아…… 똑바루 찾아왔네. 너 나 모르갔니…… 너 영숙이디? 나 은진이야.""머 은진이라구? 오마나, 이게 몇 해 만이가. 야, 이젠 잘 몰라보갔구나. 언제 이남 내려왔네? 들어오라, 비 맞가서. 어서 들오라우.""벌써 다 젖어서. 찾기 쉽구나."나는 마루로 뛰어나갔다. 어른인 그들의 아이들 적 말투가 재미있었다. 그들은 떠들면서 마당에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 옆에 어른의 털 스웨터를 머리까지 들쳐쓴 계집아이를 먼저 발견했다. 어머니는 뒤늦게 그 아이를 보았다."야는 누구가…… 거 춥갔구나야. 더 젖지 않아서?"어머니가 그애를 냉큼 들어다 처마 밑에 옮겨주며 말했다."이건 우리 큰놈이야…… 너 인사 안 해?"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꾸벅하며 허리를 꺾었다. 아주머니가 차가운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기래, 참 잘생겼구나. 아이들 홈자 키우노라 고생 많디?""머…… 그낭 그래.""세월이 빠르기두 하디."우리가 떠들썩하며 방안에 들어선 뒤, 환한 불빛 아래에서야 나는 그 계집아이를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옷은 달포 전의 추석빔을 그대로 입은 듯 노랑 저고리에 빨강 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그애의 생김새는 우리와는 몹시 달랐다. 눈빛이 유리 구슬처럼 초록색이었고 머리는 구불구불한 곱슬에 밤색이었다. 그리고 눈두덩이 깊숙한데다 코가 오똑했고 우리보다 살결이 훨씬 희었다. 내게는 가슴이 짜릿하도록 예쁜 계집아이로 보였다."야, 야는 너의…… 딸이가?"어머니가 당황해서 더듬었고 아주머니는 비에 젖은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희미하게 웃었다."넌 아는 줄 알아서…… 아, 모르갔구나. 나 신의주서 교원 노릇 했디.""오…… 풍문으룬 들었디만. 그거의 해방 직후 얘기가?""이남에서 핏줄이라군 저거 하나란다. 난 쭉 홈자 살았대서.""홈자라니…….""저 아이 아버지레 누군지두 난 몰라야. 어두워서…… 몰랐디. 교원 숙소에 있뎄는데 점령군들이 트럭을 타구 몰려와개지군……."계집아이는 제 어머니 곁에 얌전히 앉아서 방 안을 둘러보는 척했다. 사실은 제 어머니의 말을 빼놓지 않고 듣고 있는 것 같았다."그랬구나…… 넌 상기두 이렇게 고운데……."그들은 고향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고 가을비가 밤새껏 내렸다.눈이 새파란 계집아이의 이름은 의외로 귀남이었다. 그 애 어머니가 꼭 열흘 동안만 부탁하겠다며 귀남이를 우리집에 맡겨놓고는 아침 일찍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좀 난처한 기색이었다. 귀남이는 그날부터 누나들은 물론 동네 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해버렸다. 하지만 그 애는 아무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고 언제나 울타리에 기대서서 행길 쪽만 내다보았다. 밥상머리에 앉았을 때에도 고개를 절대로 들지 않고 밥그릇에 코를 박고 숟가락질만 했다.일 주일이 지나자 귀남이는 차츰 우리 식구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특히 누나들은 그애가 얄밉다고 했다. 귀남이는 한 번도 웃지를 않았다. 또한 누구든 가까이 가서 말을 시키거나 집적거리면 갑자기 앙칼진 표정이 되어서 손톱을 세우고 할퀴는 것이었다. 드디어는 어머니가 그애를 데리고 있기가 매우 어렵다고 동네 아낙네들에게 하소연하게 되었다. 한 달이 지나도록 그애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어느 날 이모가 찾아왔다. 이모는 귀남이 엄마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으며 새로운 소식을 한다름 안고 왔던 것이다. 그애의 엄마는 지금 일선의 어느 기지촌에서 아예 양공주로 나섰다는 얘기다."그 미친년, 이번엔 아마 깜둥이 새끼를 낳을 거야요."이모가 분개해서 말했다."여자 홈자 살긴 너무 거틴 세월이다."어머니도 중얼거렸다. 이모는 그네가 저 로스케의 트기 계집아이를 찾으로 오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약한 마음을 알고 떠맡기려는 수작이라고 흥분을 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귀남이는 우리집에 와서 언제나 그랬듯이, 말라붙은 담쟁이의 가지가 가득 찬 양지 쪽 울타리에 기대서서 행길 쪽만 바라보았다.그애가 꼭 한 번 입을 열었던 적이 있었다. 내가 오전 수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그날은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귀남이는 울타리 앞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대신에 창가에 붙어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애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공책을 펴놓고 숙제를 했다. 그때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눈, 눈 온다!"나는 고개를 들었다. 굴뚝 위로 바람에 흩날리는 재와 같은 작은 날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나도 창가에 섰다. 땅에는 젖은 자취가 보였으며 내리자마자 녹아버리는지 눈의 흔적이 없었다. 첫눈이었다. 내게는 그 눈보다도 귀남이가 말을 한 것이 더 신기했다."너두 눈 오는 걸 좋아하니?"귀남이는 나를 힐끗 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흰빛이 점점 빽빽해졌다."하…… 많이 오네."귀남이는 늘 말썽을 피우고 벌을 서는 아이처럼 윗목의 방구석에 단정히 앉아서 고개를 숙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지냈다.드디어 십이월이 거의 지났갔을 무렵,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귀남이를 보내기로 작정했다.마태오 신부님이 저애를 좋은 곳에 소개한다는구나. 귀남이한테두 그게 훨씬 나을 거야.마태오 신부님은 염창 마을에 있는 성당 곁의 "나카무라 집"에 사는 서양 선교사였다. 나카무라 집은 옛날 일본인 교장이 살던 낡은 이층 목조 가옥이다. 그 집에는 울긋불긋한 구제품 옷을 입는 귀남이 또래의 서양 얼굴을 가진 아이들이 늘 대여섯 명씩 있었고, 여름에는 수녀가 아이들을 발가벗겨 목욕을 시키는 광경도 본 적이 있었다.따라오지 말라고 처음에는 엄하게 굴던 어머니가, 내가 졸라대니까 하는 수 없이 그러면 동구밖까지만 쫓아와도 좋다고 승낙했다. 나는 나카무라 집까지 따라가기로 혼자서 작정해버렸다.오정 때쯤에 집을 나섰다. 누나들은 역시 콧등도 내밀지 않았다. 귀남이는 우리 어머니가 지어준 담요 기지로 만든 바지에다. 자기 어머니의 그 낡고 커다란 털 스웨터의 소매를 걷어서 뒤집어쓰듯 걸치고 있었다. 귀남이는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똑바로 보면서 어머니의 뒤를 타박타박 쫓아갔다.그애는 한 번도 우리 동네 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그애의 곁에서 붙어서 저기는 중국집이고, 또 저기는 모퉁이에 과자집이 있다는 둥 하면서 공연히 지껄일 때마다 귀남이는 그쪽은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마태오 신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털이 길고 키가 작은 삽살개가 쫓아나와서 우리에게 무턱대고 꼬리를 내저었다. 어머니는 신부와 잠깐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검은 가운을 입은 키가 큰 신부가 성큼성큼 다가와 귀남이를 안아올려 입을 맞추었다. 그애는 상을 찡그렸을 뿐이다. 어머니가 인사를 했다. 우리가 돌아서서 얼마쯤 걸었을 때였다.귀남이가 밤색 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애는 곧장 내게로 달려왔다. 귀남이의 할딱이는 숨소리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나는 또 할퀴려는 줄로 알고 여차하면 뒤로 피할 자세를 취했다. 귀남이는 내 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잘 가."짧게 말한 뒤, 그애는 야무지게 입을 다물고 이번에는 천천히 나카무라 집 쪽으로 걸어갔다.어머니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내게 물었다."뭘 줬니?"나는 손을 펴보았다."단추예요."사슴이 새겨진 금색 멕기의 낡은 쇠단추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단추는 따뜻했다.

지붕 위의 전투
집 앞으로 동네 사람들이 수군대며 몰려 지나가는 게 보였다. 아이들이란 구경거리가 생기면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마련이다.나도 행길로 뛰어나갔다. 썽성루 위쪽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썽성루에서 마주 뚫린 길 모퉁이에는 작은 이발소와 솜틀집이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언제나 쌀겨와 먼지가 뽀얗게 날아 다니는 방앗간이 있었다.방앗간이라기엔 좀 미안하게도 그것은 여러 개의 바퀴와 피댓줄이 돌아가는 작은 공장 같은 정미소였다. 아이들은 정미소라는 말이 생소했는지 언제나 방앗간이라고만 불렀다. 방앗간 뜨락에는 용감한 거의 한 쌍이 돌아다녔는데, 우리가 길을 질러가기 위해 뜨락을 통과하면 요란하게 짖어대며 쫓아왔다. 머리를 땅에 댈 듯이 숙여 공격 자세를 취하고 빠른 걸음으로 덤벼드는데 진땀이 날 정도로 제법 무서웠다.하여튼 나는 방앗간 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사람들의 술렁임으로 알아차렸던 것이다. 국원이를 도중에서 만났다. 국원이는 벌써 소동의 내막을 대충 들었다고 했다. 염색소 다니는 일꾼이 심부름을 갔다 오다가 보고는 얘길 해주더란 것이다."굵은 전깃줄이 지붕 위루 늘어진 걸 모르고 어떤 애가 지붕에 얹힌 공을 꺼내러 올라갔다가 붙어버렸대. 난 거기까지만 들었다.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다 끝났는지두 모르겠다.""아직 안 끝났을 거다. 사람들이 저렇게 몰려가는데……."우리는 이발소 앞길에 이르렀는데 벌써 진을 치고 구경하는 사람들로 길이 막혀 있었다. 순경 한 사람이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지르며 혼자서 쩔쩔매는 중이었다. 자전거를 끌어다 짐 싣는 판을 딛고 서서 구경하는 사람, 맞은편 담 위에 나란히 걸터앉은 사람들, 그리고 아이들은 어디 더 잘 보일 만한 장소가 없나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어른들 사이에 서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곤 그들의 궁둥이와 고작해야 머리꼭지의 가마뿐이었다. 국원이와 나는 몹시 난감해져서 뒷전에서 어정거리기만 했다. 그때 국원이가 손가락을 양키처럼 딱 튕기며 말했다."아참, 썽성루 옥상을 잊어버렸구나. 거기선 우리 동네가 다 내려다 보이잖아.""그래, 목재소 위루 해서 거기 쇠다리에 닿는 데가 있지."우리들은 그 동네 아이들이었으므로 어느 집과 길이 어떻고 거기 어디쯤이 무슨 모양의 돌이 박혀 있는지도 잘 기억할 정도였다. 우리는 일꾼들 눈에 띄지 않게 목재소로 들어가 쌓아놓은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끝에 이르니 쌍성루 삼층 바깥에 튀어나온 쇠사다리의 중간쯤에 닿는 것이었다. 우리는 녹슨 쇠사다리를 조심해서 딛고 올라갔다. 그러나 옥상에 닿기도 전에 고개를 위로 내밀었다가 곧 실망해버리고 말았다."요논들 먼때메 온나오니?"옥상에는 고문관이 먼저 와서 떡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는 상이군이이었다. 중부전선에서 파편을 맞고 제대를 했다는데, 언젠가 우리가 병정놀이를 할 때에 계급 순위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해준 적이 있었고 경례하는 모범 동작을 가르쳐준 일도 있었다. 전쟁에 나갔으면 뭘 해. 혀 짧은 묘한 말씨 때문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그는 쌍성루 아래 일세집 구석방에서 노모와 누이동생들이랑 같이 사는는 누이는 양키를 끌어들이는 양공주였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들 씽씽한 젊은 놈이 빈둥빈둥 놀면서 누이를 그따위 짓이나 하도록 내버려둔다고 비웃었고, 그런 생각은 곧 아이들에게도 전염되었던 터였다. 며칠 전에도 아이들은 그가 군대에서 신통했을 리가 없다고 벌써 의논을 마친 상태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바보라 한들 그는 어른이고 우리는 아이가 아닌가.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방앗간 지붕이 보고 싶어 그래요.""짜식든 또 고문관이다구 논녀바다. 온나와서 구경해다."고문관이 너그럽게 허락했다. 국원이와 나는 생쥐처럼 또르르 달려가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정미소의 지붕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였다.정미소 위로는 굵다란 전선이 늘어져 있었는데 아이가 전선에 휘감긴 채 쓰러졌고 등에서는 옷이 타는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낙수받이에 걸린 고무공도 보였다. 지붕 위에는 정미소 사람 몇이 올라서서 긴 장대로 전선을 걷어내려고 휘젓고 있었는데 갈라진 전선들이 마찰될 때마다 뿌지직거리며 푸른 불빛이 번쩍였다. 어느 노인 하나가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지붕으로 올라왔다. 두 손에는 찢어진 자동차 튜브를 감고 있었다. 노인이 튜브 감은 손으로 전선을 잡아챘지만 여전히 아이에게 휘감긴 부분은 떨어지질 않았다. 아이는 전선이 좌우로 뒤틀릴 때마다 꿈틀꿈틀했다. 노인은 다시 아이를 떼어내려고 몸에 닿은 전선을 잡아채는데 왼손 위에 늘어졌던 전깃줄이 정말 살아 있는 뱀처럼 노인의 팔뚝에 철썩 엉겼다. 노인이 비틀거리며 왼쪽으로 쏠리다가 넘어졌고 이어서 다리에 전선이 또 한번 휘감겼다."으…… 으으!"나머지 손을 뻣뻣하게 쳐들면서 노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노인은 전선에 휘감겨 붙어버린 다리를 빼내려고 버둥대다가 간신히 한쪽 다리를 떼어냈는데 피부가 벗겨져나갔는지 피가 흘러내렸다. 노인은 자유로운 손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면서 비명을 질렀다. 아래에서 구경하고 섰던 사람들은 모두 쥐죽은 듯했고 누군가가 소리쳤다."변전소에 연락을 한 거냐, 어떻게 된 거야. 두 사람다 내버려두면 죽는다."그러나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물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순경은 초조하게 시계만 들여다볼 뿐이었다."나쁜놈든 가트니…… 구경만 함 다야? 얘든아 내가 가따온다. 경네해다, 경네."나는 벌떡 일어선 고문관을 어리둥절하여 바라보았다."선임하사가 전투에 나가는데 경네 안 하기냐?"국원이와 나는 어쩐지 그가 농을 걸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나란히 기립해서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쪼아!"고문관이 멋지게 일직선으로 손을 내리며 경례를 받았다. 잠시 후에 구경꾼들의 술렁대는 소리와 함께 고문관이 지붕 위로 나타났다. 그는 전혀 맨손이었다. 먼저 노인에게 달려들어 감긴 전선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온몸은 거세게 떨렸고 전압을 견디느라고 경직된 근육들이 부풀었으며, 고통을 참는 그의 눈알이 생선처럼 불쑥 튀어나왔다.전선이 붙었다가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깊은 상처가 나면서 피가 흘러 고문관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드디어 그가 노인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상체를 굽히고 조심스럽게 기어가 노인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고문관은 다시 아이 몸에 감긴 전깃줄을 잡아떼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피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국원이와 나는 정말로 고문관 아저씨가 불쌍해서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그가 아이의 등에 감긴 전깃줄을 떼어내고 다시 다리에 감긴 부분까지 떼어냈는데, 이번에는 아이를 떼어내자마자 뒤로 넘어졌다. 전선이 그의 온몸을 휘감아버린 것이다. 그는 고무 튜브를 손에 쥐고 허우적거렸다. 아이가 지붕 아래로 끌어내려지자 구경꾼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나 고문관은 식인수에 휘감긴 타잔처럼 지붕 가운데서 전깃줄에 붙잡힌 채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고문관이 몸을 굴렸다. 그리고 지붕 끝까지 가서 하반신이 아래로 축 처졌다. 사람들이 일시에 와아, 하고 놀라는 소리를 질렀다. 잠깐 그런 자세로 매달려 있었는데 행길 쪽에서 고물 드리쿼터 한 대가 털털거리며 달려왔다. 순경이 다시 활기를 되찾아 사람들에게 비키라고 고함을 쳤다. 그것은 두 사람의 전공을 태운 전기회사 차였다. 그들은 전선이 늘어진 전봇대 위로 올라가서 시작했는데 지붕 끝 쪽에 걸려있던 고문관이 다리를 버둥거리더니 전선을 몸에 매단 채로 아래로 뚝 떨어졌다. 고문관을 휘감았던 전선이 이발소 앞에까지 길게 늘어져 있고 놓여난 그가 길 위에 넘어져 있었다. 국원이가 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죽었을 거다."사람들이 몰려가서 고문관을 떠메어가려고 겨드랑이를 잡았을 때, 그가 다리와 팔을 휘저어 뿌리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피 묻은 양쪽 팔뚝을 쳐들어 모여든 사람들에게 흔들어 보였다.며칠 지나서 그가 다시 거리에 나타났을 적에 어른들은 아무도 그를 바보라고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나와 국원이는 다리를 절뚝이며 쌍성루 쪽으로 걸어가는 붕대투성이의 고문관을 앞지르고 달려갔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저 옥상에서처럼 경례를 척 올려붙였다."쪼아!"하면서 그가 답례를 해왔는데 그때부터 우리는 그를 특무상사라고 고쳐 부르기로 했다.

도깨비 사냥
"둑 너머에서 모두 모이기루 했다."이런 일에는 언제나 앞장을 서는 목재소 집의 정삼이란 아이가 털어놓았다."국원이두 나온댔어.""몇 명이나 갈 거니?"내 물음에 정삼이가 으스대는 말투로 대답했다."쬐끄만 애들은 붙이지 않구 우리만 가기루 했다. 모두 사학년 이상이야. 너는 내가 뽑았다."정삼이 따위에게 뽑힌다는 게 기분이 상해서 나는 슬쩍 뻗대어보았다."난 못 나올지두 몰라. 시골 가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무서우니까 그러지 너?""무섭다구…… 내가? 임마, 나는 귀신바위에서 헤엄두 쳤어. 태영이네 장의사 상여 속에 지금이라두 들어갈 수 있다."정삼이는 곧 그 점은 인정을 했는지 다른 방법으로 나를 꾀었다."너, 광국이두 간다."나는 솔깃해졌다. 광국이는 정말로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아이였다. 그애는 술 장수인 제 엄마의 매질을 피하여 오래 전에 집에서 달아났던 적이 있었다. 광국이는 가출해서 온갖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일년 만에 돌아왔던 것이다. 고아원에서 취침과 기상 나팔을 불었던 광국이는 지금도 목에다 나팔 꼭지만을 걸어메고 다녔다. 고양이 울음 같은 소리로 그애는 나팔 꼭지를 불었는데, 우리는 깊은 밤에 그애가 샛강 둑 위에서 부는 소리를 듣곤 했다. 광국이는 동네 아이들 중에서 단연 어른이었다. 그애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제법 아는 듯했고 특히 우리들 중에 누군가 어리석은 질문이라도 할적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는 얼굴이 근사했다. 나는 광국이에게서 그 무렵에 한창 어른들이 부르던 유행가도 배웠다.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제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광국이가 간다면 나두 간다."참지 못하고 나는 불쑥 그렇게 말했다."그럴 줄 알았다. 사실 이번에두 광국이가 젤 먼저 생각해낸 거야.""내가 갖구 갈 건 전짓불이랬지?""응, 담요두 한 장씩 필요하대. 요새 밤에는 아주 추우니까……."처음에는 심드렁했던 나도 일단 마음이 내키니까 아랫배가 간질거리도록 안달이 났다. 우리는 지난겨울부터 말로만 했왔던 도깨비 구경을 실지로 해보려는 참이었다.모랫말 동네에서 동쪽으로 쭉 나가면 둑이 가로막혀 있었고, 둑을 지나 잡초가 자란 황폐한 습지를 질러가노라면 들판 끝에 우중충한 건물 한 채가 있었다. 건물이랬자 군데군데 시멘트벽이 벗겨져서 벽돌이 벌겋게 드러난 창고 같은 집이었다. 우리 동네 길 건너편의 공장관사 쪽에 가면 그런 건물들이 수십 채나 있었지만 이 건물만은 좀 달랐다. 전쟁통에 온통 부서진 공장 부근에는 아이들이 떼지어 놀러 다녔어도 들판에 있는 그 건물 근처에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누나들이 간혹 나물을 캐러 근처에 가면, 얘들아 귀신 나올라! 하고 서로 놀리면서 금방이라도 뭔가 뒤를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달아나곤 했다.우리는 그 건물 모퉁이에 삐죽이 솟은 굴뚝을 특히 두려워했다. 거기서 검은 연기가 올라 파란 하늘에 흩어질 때면 모두들 속삭이는 것이었다."누가 죽었구나.""사람이 메뚜기처럼 타겠지."우리 또래들은 모두들 전쟁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거기서는 샛강 백사장에서 학살당한 수입여 구의 썩은 시체를 밤새껏 태운 적이 있었다.나는 시체의 썩은 냄새를 생생히 기억한다. 거기서는 간장 졸일 때 같은, 그리고 비린 것이 삭는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발을 오래 씻지 않아 발가락 사이에 끼는 때에서 풍기는 냄새와 같았다. 그런 냄새와 더불어 화로 안에서 머리카락이나 손톱이 타는 듯한 냄새.전쟁이 온 마을과 거리를 휩쓸고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죽건 말건 아직은 두려울 겨를이 없었다. 차츰 산과 들판과 강이나 나무 숲에 대한 눈길이 되살아나고 어느 정도 아이다운 생활이 시작될 무렵에야 우리는 그때를 악몽처럼 깊숙이 간직하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깊은 못에 가라앉은 돌처럼 그것은 묵직했다. 들판 가운데 음산하게 서서 가끔씩 불길한 연기를 뿜어올리는 반쯤 부서진 벽돌 건물은 전쟁 때 그대로였다. 머리 풀고 올라가는 게 뭐지?그건 히히히, 화장터 굴뚝에서 오르는 연기지 뭐야. 석탄이나 솔가지가 타는 게 아니라 시체가 타구 있단 말야.별이나 달이나 해는 아주 멀리서 가끔 지거나 뜨거나 사라지곤 했지만, 사람이 죽는 일은 늘 우리 근처 우리 동네 가운데 있었다. 거기서 도깨비불을 보았다는 소문이 많이 나돌게 마련이었다. 어두워지기만 하면 그 건물에서 타죽은 모든 귀신들이 모여들어 희희덕거리고 다투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뿔 돋치고 털이 많이 나고 수영 빤쓰를 입은 도깨비가 아니라, 전화줄에 손이 묶인 해골 바가지들이 줄지어 나온다는 소문이었다. 우리는 바로 거기 가서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가 한 마리만 잡아올 계획이었다. 저녁에 나는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는 틈과 누나들이 잡지에 열중한 틈을 이용해서 두 가지 물건을 챙겨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국방색의 미제 플래시와 낡은 담요를 옆구리에 꼭끼고 있었다.둑 위에 올라서니 포근한 봄바람이 볼에 부딪혔고 샛강의 물풀 냄새가 상쾌했다. 우리는 서로 찾을 필요도 없었다. 광국이가 불어대는 나팔 꼭지 소리를 따라서 아이들은 제각기 모여들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다. 나, 광국이, 정삼이, 국원이, 영달이 들이었다."또 있냐?"광국이가 꼭지를 불다 말고 물었다."수남이가 왔으니까 이제 다 모였다."정삼이가 손가락으로 꼽아보면서 대답했다. 샛강 건너편 비행장에서 탐조등이 좌우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스치는 불빛이 어두운 강의 수면을 일직선으로 가르면서 지나가곤 했다. 우리는 미군 부대의 송유관을 타넘고 둑방 아래로 내려갔다."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데…….""어디쯤인지 알지?""응, 저기 봐라. 저쪽에 희미하게 불빛이 보이지?"광국이가 어둠 속에 까물대고 있는 불빛 한 점을 손가락질해 보였다. 우리는 그게 화부의 집임을 알고 있었다. 화장터는 그 부근일 테지."참, 모두들 준비해왔니?""그래 난 담요하구 플래시.""나는 대영빵 다섯 개.""담요 대신에 나는 우리 형 군복 잠바를 가져왔다.""나는 몽둥이하구……."말하는 국원이를 광국이가 가로막았다."야, 누가 그 따위를 가져오랬어?""정삼이가 그러더라."광국이는 소리내어 웃었다."몽둥이루 어떻게 귀신을 잡니, 연기를 몽둥이로 때려봐라 아프겠어? 그보다 담배는 누가 가졌지?"정삼이가 뒤적이더니 담배 두 개비를 내밀었다."어휴, 이거 쌔비느라구 혼났다. 우리 아버지 주머닐 뒤졌거든. 그런데 애들이 담배 피면 키가 안 큰다던데……."그러나 광국이는 담배를 받아 절반씩 자른 다음에 한 개비를 물고 제 성냥으로 붙여 물었다."이건 피울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귀신들은 불을 무서워할 테니까."우리들은 밭고랑을 넘어서 화장장으로 접근했다. 물 흐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 우뚝 서 있는 화장장의 굴뚝을 알아보자 나는 그만 심장이 딱 멎는 것만 같았다."정말…… 괜찮을까?"영달이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중얼거렸고 광국이가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정삼이가 우겨서 나두 따라온 거다. 느이들 진짜 귀신을 잡을 수 있다구 생각하니?"국원이와 내가 차례로 말했다."잡는 게 아니라, 그냥 한번 만나보려구 그런다.""여기서두 잘 보이구, 잘 들리겠다."광국이는 소리 내어 웃었다."하하, 너희들 무서운 게로구나.""아냐, 절대루 무섭지 않아.""그러니? 난 무섭더라. 귀신은 만물의 영장이 죽어서 생긴다니까 아마 되게 무서울걸."하고 나서 광국이는 귀신을 막는다던 담배꽁초를 서슴없이 버렸다."어떻게…… 그냥 바람이나 쐬다 갈테야?""나는 간다. 겁쟁이들은 집으루 가버려두 좋아."정삼이가 내 전짓불을 뺏어들고 앞장을 섰다. 광국이는 두고 보겠다는 듯이 그 뒤를 슬슬 따라갔고 우리는 셋이 똘똘 뭉쳐서 쫓아갔다.건물 안은 몹시 캄캄했다. 별빛마저 새어들지 않는 안쪽에 벽돌 가마가 있었다. 밖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지만 건물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강바람 소리가 제법 스산했다. 슬레이트 지붕이 덜거덕거리는 소리에 진땀이 솟았다. 우리는 흙바닥에 동그랗게 쪼그려 앉았다. 광국이가 전짓불을 쳐들어 이곳저곳을 비춰보았다. 짜식이 우리에게 겁을 주느라고 목소리까지 낮게 깔고 불빛을 비추며 말했다."바로 저기에 시체를 넣는다."네모반듯한 쇠문이 보였다. 쇠문 앞에는 넓다란 시멘트의 받침이 있었다."저기선 타버린 재 속에서 뜨거운 뼈를 골라내지."바람 소리와 건물이 덜컹대는 소리에도 차츰 익숙해졌다. 얼마쯤 지나서 우리는 굳은 대영빵을 나눠먹을 정도로 긴장이 풀어졌다. 그렇지만 완전히 마음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동네에 돌아가면 계집아이들과 꼬마들 사이에서 자랑스럽게 화장터의 하룻밤을 부풀려서 떠들 수 있게 되었다."가만 있어봐……."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영달이가 속삭이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분명히 사람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기침 소리는 쿨럭거리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내가 보구 오지."광국이가 일어나서 판자문 앞으로 되돌아오더니 중얼거렸다."누가 등불을 들고 이리로 오구 있다.""달아나자.""나가지 말아, 마주치게 될 거야. 어디…… 빨리 숨어 있자."우리는 광국이가 이끄는 대로 한데 몰려서 가마 앞의 받침대 뒤로 숨었다. 드르륵, 하면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누군가가 화장장 안에 들어섰다. 우리는 서로의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는데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등불을 쳐들고 이곳저곳 비춰보더니 벽에다 걸었다. 그리고는 기침을 쿨럭거리면서 기름통을 날라다가 가마 앞에 내려놓았다. 바로 그때에 우리들 중의 누군가가-나중에 영달이로 밝혀졌지만-재채기를 터뜨리고 말았다."누구야……?"화부 자신도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일루 썩 나오너라!"광국이가 제일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뒤이어서 우리들도 하나씩 일어섰다. 화부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우리들을 한참이나 살펴보았다."느이들 어느 동네 애들이냐?""모랫말 살아요."광국이가 또렷하게 말하고선,"여기서 담력 기르는 중입니다."하고 능청스럽게 덧붙였다. 화부는 기름통을 들어가 화구 뒤에 쏟아 부으면서 중얼거렸다."어서들 가거라."우리들이 나가려고 하자, 광국이는 화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아저씨, 내일두 불을 때나요?""빨리 가지 않으면 느이놈들 저 안에다 하나씩 처넣을 테야."하자마자 국원이가 이젠 못 참겠는지 울어버리고 말았다. 화부는 한숨을 쉬었다."여긴 애들이 올 데가 못 된다. 이놈들아 귀신이 정말로 나온단 말여."광국이가 물었다."아저씨 봤어요?""매일 밤 본다."화부의 입에서는 지독한 술냄새가 끼쳐왔다."느이들 그전부터 모랫말 살았냐, 사변 때두 살았어?""여기서 났죠.""그땐 꼬마였잖아……."광국이와 정삼이가 대답했다. 화부는 뜨림을 꺼억 하더니 담배를 피워물었다."그무렵엔 밤새도록 일했지. 그렇게 많은 시첸 내 평생 처음이여.""그런데…… 왜 우리들은 귀신이 안 보이지?"광국이가 중얼거렸고 화부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놈아 귀신 보구 싶냐? 어른이 돼서 죄를 많이 지어봐라."화부 아저씨가 가래침을 돋우어 뱉고는 우리에게 물었다."느이들 아버지 중에 누구 청년단 들어갔던 사람 있냐""우리 아부지요."정삼이가 대답했다.'느이 아버지가 누군데……."영달이가 정삼이 대신 말했다."얘네 아부지는 모랫말 목재소 주인이래요.""어…… 그 사람 아직 살았나?"화부는 알 수 없는 소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느이 아버지보구 공작창 뒷마당 우물에 가봤냐구 물어봐라."광국이가 말했다."얘네 집엔 애들이…… 정삼이만 남았어요. 목재소에 불이 났거든요. 그땐 모랫말이 다 타는 줄 알았는데.ꡓ화부는 고개를 끄덕였다."다 안다, 알어. 세상 일에 공짜가 어딨어. 자, 이놈들아 어서들 가지 못해?"밖으로 나오니 강변에 안개가 짙게 내려 덮이고 있는 봄밤이었다. 아이들은 제각기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언제 그랬냐 싶게 무섬증이 모두 사라지고 의기양양해져 있었다."동네 가서 뭐가구 풍길까?"나는 풀냄새를 한껏 들이마시면서 물었다."뭐라긴…… 귀신을 봤다구 해야지."정삼이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우리는 밭고랑을 넘어서 둑으로 올라갔다. 비행장의 불빛들이 아까보다 더욱 희미하게 껌벅이고 있었다. 뒤처져서 따라오던 광국이가 말했다."정삼아 느이 아부지한텐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어째서……."광국이는 담배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놀라실걸."우리는 둑방 위에 서 있었다. 이미 생쥐들도 잠든 깊은 밤이었다. 모랫말 쪽에는 창문의 불빛이 몇 점 남아 있지 않았다."내일은 십구부대 앞에 가보자."광국이가 담배연기를 멋지게 내뿜으면서 말했다."거기 하꼬방 동네에 가면 좋은 구경거리가 많지. 대낮에 양갈보하구 코쟁이들이 막 붙는단 말야."

친이 할머니
쌍성여관은 붉은 벽돌의 이층 건물이었다. 원래는 쌍성루라는 큰 중국 요릿집이었는데, 전쟁 뒤에 주인네는 망해서 아래편 단층 건물로 식당을 옮기고 이층 집은 미국의 댄스홀이 되었다.썽성여관과 쌍성루 사이에는 오물이 가득 찬 비좁고 더러운 골목이 있었는데 곳곳에 벽이 움푹 파이거나 불쑥 튀어나온 곳이 많아서 숨바꼭질에 적당했다. 특히 빈 지하실은 우리들의 본부로 알맞는 장소였다. 비록 출입구가 깨어진 유리창 아래로 늘어진 쇠사슬을 타고 오르게 되어 있어 아주 불편했지만, 일단 들어가고 나면 집을 잊어버릴 정도로 오붓하고 재미가 있었다.어느 일요일 아침에 우리는 그 안에서 쥐잡기 놀이를 했다. 시멘트의 벽에 작은 구멍이 뚫겨 있었는데 맞은편 벽의 한 뼘 크기의 하수구를 빼놓고는 그곳이 지하실의 유일한 구멍이었다. 그 속에는 아마도 쥐의 커다란 마을이 있는 성싶었다. 우리는 가끔씩 쇠사슬을 타고 내려갈 제 지하실 바닥에서 우글거리며 기어다니던 쥐들이 요란하게 울부짖으며 그 구멍 속으로 일시에 자취를 감추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각자 몽둥이와 부지깽이를 가지고 쌍성홀의 지하실 본부로 모여서 쥐의 소탕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그 무렵에 학교에서는 쥐꼬리를 모아오라는 숙제를 내주었고 많이 모은 아이들은 상품도 받았다.집에서 쥐약을 놓으면 어디로들 기어가서 죽는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다. 또한 쥐덫을 놓는다 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꼬리는 고작해야 두어 개뿐이었다. 그렇다고 아직은 잡초가 무성한 쌀집 텃밭의 덤불 속을 뒤져서 들쥐를 잡기도 어려웠다. 또한 들쥐는 몸집도 작고 주둥이가 뭉툭해서 잡기에는 아까울 정도로 귀여운 데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본부 청소도 할 겸 쥐꼬리도 모을 겸 하여 지하실의 구멍속을 습격하기로 모의했다.우리가 지하실 바닥에 내려섰을 때에도 역시 쥐들은 맞은편의 하수구를 들락거리며 음식물 찌꺼기를 나르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때처럼 별로 놀라거나 징그러워하지도 않고서 전투원답게 여유 있는 웃음을 씹으면서, 이 불쌍한 적이 부지런히 구멍 속으로 도피하는 꼴을 오만하게 바라보았다."먹이를 구멍에서 제일 먼 곳에다 뿌려두자.""그래, 너는 구멍을 지켰다가 많이 쏟아져나오거든 막대기를 쑤셔박아."우리는 제각기 떠들어대면서 참기름을 듬뿍 바른 밥덩이를 지하실 구석에다 떨어뜨려놓고 영달이만 구멍 옆에 남겨놓았다. 국원이와 나는 일층으로 오르는 막힌 통로에 닿은 계단 위로 냉큼 뛰어올라가서 살기에 가득 찬 몽둥이를 쥔 채 조바심치며 기다렸다. 쥐들이 머리를 하나둘씩 구멍 밖으로 내밀더니 먼저 한 놈이 적당한 거리만큼 기어 나왔다가 쪼르르 되돌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또 한 번 기어나와서 저만큼 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짓을 되풀이하고 나서, 이번에는 두 마리가 한꺼번에 기어나왔다. 기어나온 쥐들은 고소한 냄새를 따라서 더듬어갔다가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다시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좀처럼 나올 것 같지 않다가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가 차례로 기어나와 제법 대담하게 일직선으로 먹이를 향하여 달려갔다. 벽에다 새워둔 빗자루처럼 꼼짝 않고 서 있던 영달이가 막대기로 시멘트 구멍을 꼭 막아버리고 나서 그제사 숨을 몰아쉬며 낄낄 웃었다."잘 걸렸다. 다섯 마리야.""저 흉칙하게 생긴 놈부터 때려잡자."우리가 이빨을 드러내고 살의에 가득 차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기 직전에, 이 가엾은 족속들은 필사적으로 구멍을 향하여 돌진했다. 막힌 구멍 앞에까지 되돌아갔다가 벽을 따라서 길길이 뛰면서 달아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풀에 놀라기도 하고 낄낄거리며 서로 나무라기도 하면서 이놈들은 모두 때려잡았다. 세 아이들은 포획물의 꼬리를 잡고서 유리창 밖으로 한 마리씩 내던져두고 나서 다시 구멍을 열어놓곤 했다.한 차례의 사냥 뒤에는 제법 기다려야만 했다. 쥐들이 점점 신중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먹음직한 고소한 참기름의 냄새가 쥐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지 유혹을 참지 못하고 한두 마리씩은 꼭 기어나오곤 했다. 우리가 법석대며 몽둥이를 이리 휘두르고 저리 치고 하는 중인데, 누군가가 지상의 유리창 사이로 고개를 처박으며 지하실에 대고 소리쳤다."야 뭘 해?"쌍성루 집의 친이 그 넓적한 상판을 불쑥 내밀고 있었고 곁에는 검은색 바지와 헝겊신을 신은 작은 두 발이 보였다."왜 임마…… 여기서 쥐 잡는다.""학교에서 쥐 꼬랑지 모아오래.""야, 누가여기서 쥐 잡으라구 해서."친은 예전의 자기 집이라 막을 권리라도 있다는 건지 제법 뻑세게 나왔다. 우리는 평소에 친을 아주 만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애의 솜누비옷이나 이상한 단추가 여럿 달린 흰 무명 저고리도 우스웠고 무엇보다도 친은 어린애로서는 엄청난 뚱보였다. 늘어진 볼에 눌려서 눈과 코와 입은 마치 찐빵의 주름과도 같았다. 턱에는 주름이 셋이나 잡혔고 다리 하나가 우리들의 허리만했다. 국원이가 친의 말투를 흉내내어 대답했다."우리 쌀람이 잡구 싶어 잡아해.""야, 너 혼이 난다. 주인집 안경 여자 알아해면 고반소에 잡혀간다.""일러라 찔러라, 니 콧구멍 콕콕 찔러라."친의 곁에 보이던 작은 헝겊신이 움직이더니, 술래뱃장 할망구가 유리창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친이네 할머니의 어머니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 여자의 나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듣기로는 아득한 옛날에 둑이 터져서 홍수가 났었다는데, 그때에도 친이네 할머니의 어머니는 아주 늙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 살은 넘었을 거라는 얘기였다. 우리가 그 할멈을 술래뱃장 할망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해마다 겨울이면 길가 양지쪽에 나와 앉아서 친이네 누이의 머리에서 서캐를 골라내는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할망구가 그걸 골라내서는 연신 빨아먹고 버린다고 수군거렸다.술래뱃장 개뱃장 이불 밑에 이 잡아먹고송장 밑에 피 빨아먹고하고 술래를 놀리는 노래에서 따온 게 분명했다. 어른들 말대로 여자가 귀한 고장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묶어버려서 우리 발보다도 작았고, 허리는 잔뜩 굽었으며 머리는 듬성듬성 빠지고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우리는 골목에서 놀다가도 그 노파가 먼 곳에 보이기만해도 뿔뿔히 흩어져서 달아나곤 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텅 빈 입을 벌리고 웃는 모양을 해 보이고 있었다."큰탈났다. 달아나야지.""어디루 달아나니?""쥐새끼 꼴이 됐는걸."서로 두리번대며 겁먹고 있는데 할멈이 뭐라고 작게 말했고, 친이 다시 저희 말로 쏼라쏼라한 다음에 우리에게 외쳤다."쥐 하나 주면 일르지 않아해.""거기서 아무 거나 골라 가져라."의외로 수월한 요구였으므로 우리는 아깝지 않게 꼬리 하나를 손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이었다."아니 아니, 살아한 거 하나 잡아. 우리 할머니 준다."우리는 눈이 휘둥그렇게 되었다. 그래도 아무튼 뒷보가 약한 건 우리 쪽이니까 선선히 대답했다."그래 산 채루 한 마리 잡아다가 줄게. 까짓거 두 마리쯤까지는 문제 없다.""아니 하나만 잡아해면 좋아."친이와 할망구는 저희끼리 지껄였다."뒤루 와해. 앞에 가지 말아."친이의 말은 반점으로 들어오지 말고 뒤채인 살림집으로 돌아 들어오라는 뜻이었다. 우리는 쥐를 스무 마리쯤 잡았고 꼬리를 끊어서 골고루 나눴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 제일 강심장이었던 국원이가 발로 꼬리를 밟아서 사로잡은 쥐 한 마리를 노끈에 꿰어서 친이네 뒤채로 갔다. 친은 반색을 하면서 쥐를 갖고 들어가더니 끝내 쓰다 달다 말이 없었다. 우리는 궁금한 김에 서로 이러쿵 저러쿵 입씨름을 하게 되었다."야, 친이 할머니가 쥐를 잡아서 구워 먹을라구 그럴까?""설마 그렇기야할라구.""서캐도 잡아먹는데?""임마 그건 먹는 게 아니야."ꡒ아냐, 혹시 만두에다 넣을라구 그러나 부다.ꡓꡒ그런 게 아닐 거다. 아마 심심해서 가지구 놀라구 그럴 거야.ꡓꡒ징그럽게 그건 왜 가지구 놀아?ꡓꡒ알았다, 기르려구 그럴 거야.ꡓ서로 아니라거니 그렇다느니 의견을 나누어보았지만 아무래도 신통하게 짚이질 않았다. 우리는 월요일 오후에도 지하실 본부로 쥐를 잡으러 갔는데 그때에도 친이 나타나서 산 쥐 한 마리를 얻어갔다. 우리들은 더욱 궁금해졌고 결국은 술래뱃장 할망구가 요리해서 먹을 거라는 생각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날마다 산 채로 한 마리씩 들여놓았다가는 나중엔 집 안팎에 쥐가 득시글거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쥐꼬리를 구하는 일보다도 친이 할머니 일이 더욱 못 견디도록 수상해서 이번에는 화요일 오후에 쥐 한 마리만을 사로잡아가지고 친이를 불러냈다.ꡒ왜 오늘은 안 가져가니? 여기 잡아왔다.ꡓ친이는 심드렁하게 쓱 훑어보고는 말했다.ꡒ그만이다. 소용없어해.ꡓꡒ어째서?ꡓꡒ아까 우리 아버지가 쥐 잡는 그릇을 사와서.ꡓ어랍쇼, 쥐덫을 샀다니. 이젠 정말 쥐잡기에 열이 올랐구나 싶었다. 역시 국원이가 그런 방면에 빠른 편이라 친이를 슬슬 놀려대기 시작했다.ꡒ느이 할망구가 쥐고기루 반찬 해먹는다지?ꡓꡒ아니, 아니, 못써한다. 그런 말이 어딨어해.ꡓꡒ그럼 날마다 그걸 얻어다 뭐에 썼니?ꡓ친은 벌써 살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가지고 어깨를 들썩이며 씨근거렸다.ꡒ우리 롱이하구 놀아해. 어디 두고 보자. 들어와, 어서 들어와.ꡓ친이 울상이 되어 손짓했다. 우리는 넉살좋게 그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친이는 마당에 들어서면서 저희 말로 뭐라고 연신 떠들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마루에 조는 듯이 걸터앉았던 술래 할망구가 기침인지 웃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소리를 내면서 우리들에게 손짓했다. 우리는 주저주저했다. 가마솥에다 거꾸로 처박으려고 꼬이는 게 아닐까. 할머니가 마루 밑에서 꺼낸 쥐덫 속에는 생쥐 한 마리가 그물망을 움켜쥐고 새까만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쥐덫을 무릎 앞에 놓더니 아주 부드럽고 다정하고 쇠잔한 목소리로 롱, 롱, 하고 불렀다. 그랬더니 어디선가 해수를 앓는 늙은이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쿨럭이는 기침소리가 가까워져서 우리는 어딘가 하고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보이질 않았다.ꡒ아이구 엄마야!ꡓ영달이가 펄쩍 뛰어 일어났고, 건넌방의 열린 미닫이 사이로 뭔가 시꺼먼 것이 기어나왔다. 그것은 크기가 중개만이나 한 고양이였다. 검은 털이 부스스하고 수염이 몹시 길었으며 동작은 느릿느릿했다. 고양이는 꺼칠한 머리를 늘어뜨리고 연신 해수 비슷한 기침을 터뜨리며 슬그머니 할멈에게로 다가갔다.ꡒ롱, 로옹…….ꡓ할머니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쥐덫을 내밀었다. 고양이가 굵은 음성으로 한번 울더니 발끝으로 덫을 툭툭 건드리자 생쥐는 더욱 조그맣게 움츠려서 마치 회색빛의 털공처럼 보였다. 할머니가 쥐덫의 문을 열자 쥐는 나오지도 못하고 더욱 가녘에 붙었다.고양이가 입구 쪽에 앞발을 밀어넣어 생쥐를 몇 번 건드렸다. 쥐는 조금 앞쪽으로 기어나왔고, 고양이가 쥐를 덥석 물었다. 쥐가 처량하게 찍찍거리면서 발버둥을 쳤는데 고양이는 금방 놓아주고는 다시 두발로 톡톡 건드리면서 쥐를 놀렸다. 우리는 비켜서서 침만 꼴딱거리고 있었다. 쥐가 제법 마지막 용기를 냈는지 마루 아래의 마당을 향해서 뛰어내렸다. 그때에 고양이가 굵고 힘차게 울더니 놀랄 만큼 재빠르게 한걸음에 뛰어서 쥐의 등을 앞발로 눌렀다. 쥐가 계속 찍찍거리며 울었다. 고양이는 다시 몇 번을 앞발로 희롱하고 나서-우리는 한입에 삼키려는 줄로 알았다-슬그머니 뒷걸음질치더니 돌아서는 것이었다. 쥐는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고 쏜살같이 달려가 몇 번 허둥지둥하다가 수챗구멍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롱은 배를 헐떡이며 마루 아래에서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는 또 그 괴상한 기침을 떠뜨렸다. 할머니가 앙상한 손을 내밀어 마루 위로 올려주자 고양이는 다시 고개를 내려뜨리고 사라졌다.ꡒ두고봤지, 두고봤지.ꡓ친이 의기양양하게 떠들었고, 할멈은 텅 빈 입을 벌리고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냈다. 우리는 머쓱해져서 친이네 집을 되돌아 나왔다. 그것 참, 기묘한 구경거리였다.ꡒ하나두 재미없다.ꡓꡒ고양이두 되게 늙었는가 봐.ꡓꡒ하여간에 늙으면 사람이나 짐승이나 희한해지는 모양이다. 그렇지?ꡓ그날 저녁때 아이들이 모이는 전봇대의 외등 밑에서 국원이와 만났을 때, 그애는 더욱 알쏭달쏭한 자기 할아버지의 말을 들려주었다.ꡒ우리 할아버지가 그랬다. 그 할망구 오래 못 살 것 같대.ꡓꡒ어째서…….ꡓꡒ늙은이가 봄을 타면 그해에 죽는대나?ꡓ역시 그 말이 옳았는지 아니면 때가 되었던지 친이네 할머니는 봄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삼봉이 아저씨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보면, 상둣도가 마당 앞에 울긋불긋한 단청에다 희고 붉은 띠와 깃발과 색실이 주렁주렁 늘어진 상여가 놓여 있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가 누군가가 죽어서 알 수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간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상여를 꾸미는 사람은 언제나 삼봉이 아저씨다. 그는 아이들 말대로 한쪽 눈이 없는 깨꾸였는데, 손재주가 비상해서 작은 장도칼 하나면 온 세상의 물건들을 무엇이나 깎아낼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내가 삼봉이 아저씨를 알게 된 것은 ꡐ도둑놈 잡기ꡑ라는 놀이 때문이었다. 술래에게 쫓기는 도둑인 나는 컴컴한 상둣도가의 작업장으로 기어들어 음식을 나르는 작은 꽃가마 안에 숨었다. 그 속이 음산하고 두렵기보다는 우선 술래에게 발각될까 조마조마했다.ꡒ누가 거기에 들어갔냐?ꡓ굵다란 남자 어른의 음성과 뒤이어 막대기로 가마의 헝겊 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ꡒ빨리 나오지 않으면 잠가버릴 테다.ꡓ나는 긴장한데가 갑자기 혼구멍이 나서 턱을 덜덜 떨며 질려 있었다. 그때 앙증맞은 가마의 창호지 문이 열리며 애꾸눈만 확대된 듯한 남자의 커다란 얼굴이 나타났다. 머리를 삭발해서 도자기 그릇처럼 윤이 났고 코 밑에는 험상궃게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ꡒ일루 나오너라.ꡓ생긴 것과는 달리 그는 부드럽게 말하고서 바깥으로 나를 안아 올렸다.ꡒ산 사람은 그런 델 들어가는 게 아니다.ꡓ내가 겁이 나서 울기 시작하자 아저씨가 당황해서 나를 달랬다.ꡒ놀랄 건 없다. 나는 삼봉이 아저씨다. 아저씨가 뭐든 만들어줄게. 가만 있자, 호랑이 한 마리를 깎아줄까?ꡓ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삼봉이 아저씨랑 친해졌다. 그는 언제나 상여의 네 귀퉁이를 장식할 봉황의 머리나 상여틀을 끼워맞출 용을 깎았고, 여러 모양의 짐승을 만들었으며, 거기에다 물결무늬, 연꽃무늬, 구름무늬 등의 고운 색을 칠하고 있었다. 아이들과의 놀이에 싫증이 나거나 집에서 꾸중이라도 들으면 삼봉이 아저씨의 작업장을 피난처로 삼아서 찾아갔다. 곰팡내 풍기는 그의 토방 거적때기에 쭈그리고 앉아 물건이 되어가는 신기한 과정을 구경했다.ꡒ아저씨는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ꡓꡒ음, 오래 전에 내가 너만했을 때…….ꡓ하면서 그는 새파랗게 윤기가 들도록 삭발한 머리를 긁는 것이었다.ꡒ절에서 살았단다. 거기서 노스님께 배웠지.ꡓꡒ스님이 뭐야?ꡓꡒ아주 어려운 도를 닦는 사람이다.ꡓ한번은 내가 늦저녁에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만취한 삼봉이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나를 자기의 토방에 데려가서 찹쌀과자와 생밤을 주었다. 향도잡이가 되어 아저씨는 먼산엘 다녀온 참이었다.ꡒ아저씨, 사람이 죽으면 땅에다 파묻나?ꡓꡒ그렇지, 꽁꽁 파묻는단다.ꡓꡒ그럼 아주 없어지나?ꡓꡒ아니다. 몸은 모두 없어져도 혼이 남는다.ꡓꡒ혼이 뭔데?ꡓꡒ밤에 잠자면 꿈을 꾸지 않냐? 그게 바루 혼이 나다니며 겪는 일이란다.ꡓꡒ그러면 혼은 안 보이겠네?ꡓꡒ왜 안 보여, 네 할아버지 혼이 네 아버지한테 남았다가, 네 아버지 혼이 너한테 옮겨지고…… 그렇게 쭉 계속된다.ꡓꡒ응, 그러면 혼은 애기들한테 옮는구나.ꡓꡒ이담에 크면 더 자세히 알게 될 거다.ꡓ나는 당분간 상둣도가로 놀러 가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꾸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노름과 술타령으로 나날을 보내는 상두꾼들이 들끓는 장소에 어린애가 드나들면 나쁜 버릇만 배우리라고 염려했다. 더구나 도가 주인인 유 노인은 칠십 고령인데 스물두 살짜리 시골 작부를 재취로 데려와 살고 있었다.나는 상여집에 갈 적마다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은 재취댁의 창백한 얼굴과 커다란 눈을 보면 어쩐지 썰렁한 기분이 들곤 했다. 동네 사람들 말에 의하면 포구에서 그네를 쌀 열 섬에 데려왔는데, 어릴 적부터 작부짓을 해왔다는 것이다. 여자의 배가 차차 불러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를 했다.ꡒ거 사내놈들만 득실거리는 집안에 계집은 단 하나니…… 알 게 뭐야.ꡓꡒ누가 아니래. 칠순 노인네가 미륵님 덕택으로 회춘했을 리두 없구.ꡓ주인인 유 노인은 장사에 있어서는 철저해서 해소 기침을 연방 쿨럭이면서도 상여가 나갈 때엔 희 두루마기를 입고 장례 행렬의 뒤를 따라가곤 했다.언젠가 삼봉이 아저씨의 토방에 갔더니 그는 유 노인의 재취댁과 함께 뭔가 다투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삶은 돼지고기에다 그 집에서 거른 막걸리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가 취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ꡒ어, 이리 들어오너라. 술찌께미에 설탕 타서 주랴?ꡓ재취댁이 치마를 싸쥐고 부른 배를 앞세워 내 앞을 지나쳐갔는데 울었던 흔적으로 눈두덩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여자가 쑬찌께에 흑설탕을 쳐서 내게 갖다 주었다.ꡒ어쨌거나 여기선 못 살아요.ꡓ라고 여자가 말했던 듯싶다. 삼봉이 아저씨는 술을 벌컥 들이켜고 나서 천장을 쳐다보며 말했다.ꡒ사람 맘먹은 대로 되는 세상이 아냐.ꡓ나는 술찌끼를 한 그릇이나 얻어먹고 벌겋게 취해서 토방에 쓰러져 한나절이나 잠들었다.깨어보니 어두워져 있었고, 뒷방에서 상두꾼들의 화투 치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들려왔다.ꡒ깨었냐?ꡓ삼봉이 아저씨가 어둠 속에 까치다리를 하고 앉아서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ꡒ얼른 집에 가거라. 집에서들 걱정하실라. 그러구 이건 전부 너 가져라.ꡓ아저씨가 조그만 헝겊 구럭에 못 쓰게 된 용두, 봉황, 범이라든가 하는 물건들을 가득히 넣어서 내게 주었다. 나는 소근소근 말했다.ꡒ어저씨, 어디 가는 거야?ꡓꡒ쉬이…… 떠들지 마라. 나는 다시 절에 간다.ꡓꡒ거기 가서 오랫동안 있나?ꡓꡒ아주 오래…… 죽을 때까지 있을 거다. 내가 부처님께 몹쓸 죄를 지었다.ꡓꡒ부처님이 누구야?ꡓꡒ음…… 우리 큰형님뻘 되는 분이다. 잘 있거라, 아무한테두 얘기하지 말아라.ꡓ그날 밤 삼봉이 아저씨는 어디론가 몰래 떠나갔다. 처음에 유 노인과 재취댁과 삼봉이 아저씨에 대해서 쑥덕거리던 동네 사람들도 두어달 지나고 나니까 모두들 잊어버리기 시작했지만 나만은 그러지 못했다. 삼봉이 아저씨의 손때가 묻은 물건들을 한아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어느 아침이었다. 상둣도가 앞에 화사한 상여가 꾸며져 묘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를 낳던 재취댁이 당산 동네의 석산파가 밤을 새운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상두꾼 칠팔 명과 그날따라 더욱 새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입은 유 노인만이 비를 맞으며 산으로 갔다.삼봉이 아저씨가 없어진 뒤에 새로 온 얼굴 검은 상여의 앞에 향도잡이가 되어 요령을 흔들면서 목쉰 소리로 선소리를 매겼다.어허이 어허 이제 가면 언제 오나어허이 어허 내년 이때 춘삼월에어허이 어허 죽은 나무 꽃이 피면유 노인은 얼마 안 가서 중년의 행상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였다. 죽은 여자가 낳아놓은 아기는 태영이라고 불렀는데 건강하게 자랐다.나는 상둣도가 앞을 지나며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적마다, 아기가 할아버지 또 아버지의 혼으로 남겨진다는 삼봉이 아저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 애인
영화네 집은 역전 네거리에 있는 이층의 목조건물이었다. 저녁때가 되면 누구나 그 근처에서 요란한 밴드 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는데 이층 계단은 언제나 삐걱거렸다.낮에는 폐가처럼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웠고 밤이 되면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그 집 근처엘 가지 않았다.영화네는 댄스홀을 하고 있었다. 가끔 검둥이들이 웃통을 벗어던지고 칼부림을 하면서 술주정을 벌이는 날도 있었다. 무섭게 화장한 여자들이 초저녁부터 계단 아래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영화는 일학년부터 삼학년까지 나와 한 반이었던 계집아이였다. 우리는 늘 같은 길로 학교를 오갔는데, 학교에서 철길 건널목을 지나 방직공장 앞으로 해서 시장으로 가로질러 역 앞을 돌아오는 순서였다. 처음에 나는 영화에게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어느 때인가 말썽을 피워서 벌 청소를 하고 늦게 돌아오던 날이었다. 시장을 지나오는데 그날도 사람들의 작은 무리가 모여 있었다. 언제나 그 모퉁이에는 약장수들이 몰려와 바이올린을 켜기도 하고 간단한 요술도 부리고 노래를 부르거나 원숭이를 놀리기도 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공터에는 작은 천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이상한 그림 앞에서 한 사내가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자아, 보시라! 사람이냐 뱀이냐, 뱀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괴물이 나왔습니다. 직접 두 눈으로 보시기 전엔 말하지 마시오. 반은 뱀, 반은 사람인 이 괴물을 구경하시는 데 단돈 삼십환!나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과연 머리는 산발하고 예쁘게 화장한 여자의 얼굴이요, 목에서부터 몸까지는 징그러운 구렁이로 변해 있는 그림이었다. 나는 침을 꼴깍거리면서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들어가볼 수 없을까 하고는 빈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공연히 천막 주위를 서성거렸다. 구경하고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낄낄대며 웃기도 하고, 구역질이 난다고 연신 침을 뱉는 축으로 각양각색이었다. 천막의 뒤로 돌아갔는데 천막 사이를 헤치며 웬 계집아이가 빠져나오다가 나를 보자 놀란 시늉을 해 보였다.ꡒ어머나!ꡓ나는 처음엔 그애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으므로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ꡒ너 수남이 아니야?ꡓꡒ응,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이름을 아니?ꡓꡒ정말 모르겠니?ꡓ어른처럼 지진 머리를 붉은 리본으로 묶고 구제품 옷을 입은 그 예쁜 계입아이가 기억에 없었으므로, 나는 얼굴만 붉어진 채로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ꡒ삼학년 삼반에 다니던 이영화야. 왜 지프차 타구 학교에 다녔잖아.ꡓ그제서야 나는 생각이 났다. 영화는 일, 이학년까지만 해도 키가 작아서 언제나 맨 앞줄에 서곤했다. 그애는 십구부대 앞 기지촌에 살았는데 아침마다 배불뚝이의 미군이 가교사로 지어진 반달 퀀셋에 태워다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애를 ꡐ양갈보ꡑ라고 심하게 놀려대곤 했다. 한편으로 나는 그애를 은근히 좋아했던 것 같다. 영화는 우리 반에서 제일 예쁜 계집아이였고 어딘가 어른처럼 까먹은 데가 있었다. 머리를 지진 모양도 그랬고, 구제품의 옷고 그랬는데, 고무줄이나 공기 따위의 애들 놀이는 하지도 않았다. 늘 속눈썹이 길다란 눈을 아래로 착 깔고는 교실 구석에 혼자 앉아 있고는 했다.ꡒ그런데 네가 여기 웬일이니?ꡓ영화는 반가워하면서 내게 물었다.ꡒ응, 구경이 하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말이지.ꡓ영화는 가볍게 풋 하는 소리를 내었던 것 같다.ꡒ이젠 다 끝났더라. 그리구 아무 재미두 없어.ꡓꡒ정말 봤니? 반은 사람이구 반은 뱀이라며?ꡓꡒ응…….ꡓ영화는 도무지 흥미가 없다는 투였다.ꡒ너 집에 가는 길이니?ꡓꡒ벌 청소를 했어. 누구하고 싸웠거든. 유리창을 두장이나 깼단다.ꡓꡒ원…… 그럼 너 배고프겠다 그치?ꡓ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ꡒ내가 뭐 사줄게, 잠깐 기다리구 있어.ꡓ영화가 천막 사이로 사라졌다가 한참 뒤에 나타났다. 벌써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천막이 앞에서부터 걷혀지는 중이었다. 영화가 나와서 내 손을 잡고 말했다.ꡒ자, 가자.ꡓ그때에 뒤에서 굵직한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ꡒ영화야. 우린 저녁 먹었다구 그래라.ꡓꡒ알았어요.ꡓ나는 뒤를 돌아보고 그 어른이 아까 천막 앞에서 구경꾼을 모으던 남자임을 알았다. 우리는 시장 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큰길을 건너서 역전으로 나갔다.ꡒ그 사람이 누구니?ꡓꡒ우리 삼촌이야.ꡓꡒ너희 삼촌이라구?ꡓꡒ응, 며칠 전에 일선에서 돌아왔단다. 엄마가 편지해서 찾아왔지.ꡓꡒ그럼 느이 삼촌이 그 괴물을 잡아왔구나, 그치?ꡓ영화는 대답없이 배새시 웃기만 했다.ꡒ일선에는 그런 게 많이 있는 모양이지?ꡓ영화는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ꡒ우리 아버지두 함께 갔는데, 오지 않았어. 아는 아마…….ꡓ그애가 거의 안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ꡒ학교에 못 다닐 거야.ꡓꡒ그래 널 학교에서 못 봤어.ꡓꡒ싸젠이 미국에 갔는데…… 엄마는 텍사스에 나가거든.ꡓꡒ텍사스가 뭐니?ꡓ영화는 턱짓으로 바로 그 이층의 목조가옥을 가리켰다.ꡒ우린 며칠 전부터 저기서 산다.ꡓ영화와 나는 국화빵을 구워 파는 가게에서 단팥죽과 빵을 사먹었다. 네거리에서 헤어지려는데 영화가 말했다.ꡒ내가 너한테 뭐 줄게. 우리집에 잠깐만 같이 갈래?ꡓꡒ잠깐이면 괜찮아. 집에서는 늦는다구 걱정하시겠지만…….ꡓ아직 밴드의 소리가 그리 높지도 않았고, 사람들도 뜸했지만 계단 아래와 홀에는 무섭게 화장한 여자들이 거의 벌거숭이의 몸으로 웃고 떠들며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몇몇 여자들이 영화에게 알은체를 했다. 나는 겁이 났지만, 나중에 아이들에게 자랑할 거리를 생각해두느라고 연신 두리번거리며 여자들을 관찰했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홀로 들어가지 않고 맞은편으로 통한 복도를 지나갔다. 복도 양쪽으로는 중국집처럼 작은 방에 베니어의 찌그러진 문이 연이어 있었다. 우리는 맨 끝방으로 들어갔다.ꡒ들어와.ꡓ방 안에는 군용 야전침대가 놓였고 신문지로 바른 벽 위에는 양키들의 잡지에서 오려낸 벌거숭이 여자들의 사진이 사방에 붙어 있었다. 냄비와 그릇 따위의 취사도구와 여자 어른들의 손개의가 방 안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영화가 경대 서랍을 열더니 초콜릿을 꺼내어 반을 뚝 꺽어서 내밀었다.ꡒ먹어, 그리구 이것두 가져.ꡓ영화는 요요를 내게 주었다. 우리가 손팽이라고 하는 신기한 서양 장난감이었다. 실에 감아서 퉁겨주면 요요는 아래위로 오르내리면서 팽글팽글 돌아가는 것이었다. 요요를 돌려보는 중인데 거칠게 문이 열리면서 술에 만취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의 등뒤에는 키가 전봇대만하고 얼굴이 어둠 속에 묻혀버린 검둥이 병사가 버티가 서 있었다. 나는 놀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ꡒ아이 이게 누구야. 내 쌔끼로구나. 야야, 어서 께라리 해라. 엄마 돈 벌어야지. 오케이?ꡓ검둥이는 성큼 따라 들어오더니 뭐라고 쏼라대면서 야구공만한 오렌지를 영화에게 주었다. 영화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고는 문가에 나와서 외쳤다.ꡒ삼촌은 저녁 먹구 늦게 온대.ꡓ우리는 복도로 나왔다. 아까 들어왔던 길로 나가려는데 영화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ꡒ이쪽이야…….ꡓ영화는 복도의 맨 끝에 있는 문으로 나를 끌고 나갔다. 반 넘어 허물어져 사용할 수 없는 다 썩은 계단이 뒷골목에 늘어져 있었다. 우리는 거기 나란히 걸터앉았다. 영화는 오렌지를 벗겨서 내게 주었다. 어두운 하늘 속에 별들이 작은 모래알처럼 박혀서 반짝이고 있었다.ꡒ여기선 기차가 오가는 게 잘 보여.ꡓ영화가 역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기관차가 흰 연기를 내뿜으면서 역 구내로 들어오고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가득 차고 있었다.ꡒ별두 잘 보인단다.ꡓ영화는 또 하늘도 가리켰다.ꡒ너 시장에 구경하러 가지 마라.ꡓꡒ어째서…….ꡓꡒ그건 순 거짓말이거든. 뱀 껍질을 목에 감구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거야. 돈이 아깝지.ꡓ영화는 갑자기 내 어깨를 잡더니 볼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어쩐지 집에 돌아가고픈 생각이 들질 않았다.

낯선 사람
오후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어머니가 장에 갔는지 문이 잠겨 있었다. 누나들은 그즈음 학교에서 날마다 늦게 돌아오곤 했다. 전교생이 무슨 궐기대회인가를 나간다고 했다. 적성국 감시위원단을 쫓아내고 휴전을 반대한다는 모양이었다.나는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릴 겸 해서 말님이네 가게로 갔다. 거기선 찹쌀 꽈배기와 붕어 풀빵을 팔았다. 미국 만화에 번역글을 써붙인 것도 있었고, ꡐ밀림의 왕자ꡑ 연속편이 새로 나온 것도 있었으며, 설탕에 소다를 섞어서 만든 아령 모양의 또뽑기도 있었다.ꡒ말님이 아부지, 저 붕어빵 두 개만 주세요.ꡓꡒ그래그래, 방금 나와서 아주 말랑말랑하구나.ꡓꡒ돈은 이따 울엄마 오시면 드릴게요. ꡐ밀림의 왕자ꡑ 삼편 나왔어요?ꡓꡒ아직 안 나왔다. ꡐ도토리 일등병ꡑ은 나왔지.ꡓ나는 풀빵을 먹으면서 ꡐ도토리 일등병ꡑ을 보았다. 외상 군것질을 한다고 어머니에게 꾸중들을 일이 걱정이었지만 달리 별 도리가 없었다. 문이 잠겼으니 집에 들어가서 찬장을 뒤적거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때 문 밖에서 어떤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ꡒ여기 머 식사될 거 있습네까?ꡓꡒ아, 예예, 있구말굽쇼. 들어오십시오.ꡓ문이 천천히 열렸다. 이상한 남자가 들어왔다. 중학생처럼 박박 깎은 머리가 채 자라지 못해서 아직 밤송이 같았고, 얼굴의 왼쪽 볼따구니부터 입술 언저리까지의 살갗이 쭈글쭈글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그가 꼭 문둥이인 것만 같아서 빵을 움켜쥐고 달아날 뻔했다.사내는 헐렁하게 늘어진 커다란 미군 군복을 입었고 지카다비를 신었으며 하늘빛 보통이를 옆에 끼고 있었다. 말님이 아버지도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헛기침을 연신 터뜨리며 그의 아래위를 훑어보았다. 사내가 눈치를 채고 제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ꡒ머 벨루 보기 도틴 않을 거외다. 화상을 입었디요. 화염방사기가 무섭긴 합데다레.ꡓ사내는 오리의자에 앉더니 두 손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손등이 쭈글쭈글하고 흰 반점으로 얼룩져 있었다.ꡒ허어…… 거 안됐구먼.ꡓ말님이 아버지는 그제서야 앞치마에 손을 닦는 시늉을 하면서 웃었다.ꡒ뭘 드시카…… 국수 말아디릴까?ꡓꡒ예, 되우 맵게 비베달라우요.ꡓꡒ제대군인이신 걸 모르구 괜히 난 또…….ꡓꡒ아니야요. 내레 석방 포로외다. 어제 밤차루 부산서 올라왔시오.ꡓꡒ고생 많으셨겠소.ꡓꡒ말해 머하갔습네까. 같은 동포끼리 좌우켄이 무슨 상관이갔나요. 참 서분한 세월이디요.ꡓꡒ어디 연고지라도 있으슈?ꡓ말님이 아버지가 벌겋게 비빈 국수 그릇을 그에게 밀어주었다. 얼굴 흉한 남자는 하얗게 칠해진 회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ꡒ연고지가 어디메 있갔시요. 누구레 찾아볼 사람이 있긴 하디만…….ꡓꡒ누군데, 이 동네에 산다면 내가 대강은 알지.ꡓꡒ여게가 모랫말이 확실하디요?ꡓꡒ그렇소.ꡓꡒ한 열세 쌀쯤 났갔는데…… 국원이란 아이네 집이 어디야요?ꡓꡒ국원이…… 국원이라.ꡓ하며 말님이 아버지가 더듬었고 참지 못한 내가 붕어빵을 내려놓고 외쳤다.ꡒ국원이네 나 알아요. 요 위에 땅꾼언덕 위에서 염색소 하지요.ꡓꡒ오 염색소! 맞아서…… 네가 아누나.ꡓ사내가 반색을 했고 기회를 놓친 말님이 아버지가 못내 아쉽다는 듯이 한몫 거들었다.ꡒ응, 거 쌍둥이네 말이로군.ꡓ사내가 젓가락질을 멈추더니 고개를 들었다.ꡒ쌍둥이라구요?ꡓꡒ그렇소. 그 집 맏딸이 지난겨울에 아들 쌍둥이를 낳았지요.ꡓꡒ맏딸이래문…….ꡓ그때에 또 한번 나는 참지 못했다.ꡒ국원이 큰누나 말예요. 걔네 매부가 염색소 주인이지요.ꡓ사내가 국수를 먹다 말고 아까처럼 회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 후에 굵게 일그러져 아래로 말린 그의 입술이 벙긋하더니 성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그가 웃고 있음을 간신히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갑자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ꡒ야 너 혹시 잘못 안 거 아니가. 국원이 작은 누나를 잘못 알았갔디.ꡓꡒ아냐요. 국원이 큰누나요. 키가 크구 볼따구에 점이 있지요.ꡓꡒ그럴 리가 없갔는데, 그럴 리라…….ꡓ사내는 자꾸만 고개를 내저으며 혼자 중얼거렸다.ꡒ한데 그 친구레 와 그 얘긴 전하지 않았을까. 주소는 갈테주구선…….ꡓ하고 나서 사내가 말님이 아버지를 향하여 말했다.ꡒ부산 국데시장에서 학교 동창을 만났대시요. 국원이 큰누나 되는 사람하구두 같이 동창이디요.ꡓꡒ아, 그랬군요. 만나면 모두들 반가워하겠구료.ꡓꡒ가럼요, 모두 한 고향 사람들 아닙네까. 하디만…… 전쟁이 있댔으니끼니…….ꡓ사내가 자기의 손을 펼치고 들여다보았다.ꡒ많이 변했갔디요.ꡓ사내가 일어서면서 나를 불렀다.ꡒ너 그 집 안다구 했디. 그런데 여기 어드메 꽃집 없습네까?ꡓ하다 말고 말님이 아버지와 사내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ꡒ꽃집이라구? 허허허.ꡓꡒ기럼요, 서분한 세월이디요. 꽃집이 어디 있갔나요. 허허.ꡓ사내와 나는 말집 텃밭의 명아주 덤불 사이를 지나 땅꾼언덕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메를 캐어낸 구덩이가 드문드문 파여 있었다. 사내가 중얼거렸다.ꡒ어드메나 없어진 거투성이갔디. 어드메나 다 기렇갔디. 야, 이 동니에두 죽은 사람이 많디 잉?ꡓꡒ이 언덕에서두 사람이 많이 죽었대요.ꡓꡒ많이 죽어서……?ꡓꡒ전화선에 묶여가지구요…… 밤새 총을 쐈어요. 어휴, 냄새가 지독했는데…….ꡓꡒ온갖 무서운 것두 이담엔 다 맥을 못 추게 된다.ꡓ하면서 사내는 언덕 위 곳곳에 피어 있는 민들레며 자운영 오랑케꽃의 무리를 가리켰다.ꡒ저절로 피어서 가득 차 있지 않네?ꡓ우리는 언덕에 올라갔다. 전에는 솔밭이었던 그곳에 피난밑의 동네가 생겨나 있었다. 긴 장대를 세우고 물들인 미군복을 여러 줄로 걸어 놓은 건조장과, 작은 판자 헛간과, 두 개의 커다란 쇠솥이 걸린 염색소를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사내가 먼저 그쪽을 보고 말했다.ꡒ저기가 국원이네 집이가?ꡓꡒ아니에요. 거긴 염색소구요. 집은 저쪽이에요.ꡓ아와 나는 쓰레기 소각장 앞을 지나갔다. 검은 석탄재나 타다 남은 상자들과 헝겊 조각이 널린 길을 가는데 풀밭 너머로 누군가 나타났다. 연두색 치마에다 흰 반소매를 입은 국원이 큰누나였다. 그네는 쟁반에 보자기를 씌워서 들고 있었다. 아마 염색소에 저녁밥을 갖다주러 가는 모양이다. 나는 나직하게 말했다.ꡒ저기 국원이 큰누나가 오네요.ꡓ사내가 불에 데인 것처럼 그 자리에 흠칫, 서더니 내 손목을 꼭 잡았다.ꡒ내 얘길 해서는 안 된다.ꡓ여자는 무심하게 우리 쪽으로 왔고, 그네의 치마가 경쾌하게 무릎 부근에서 출렁거렸다. 사내의 팔이 내 손목 위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온 국원이 누나에게 인사했다.ꡒ국원이 집에 있어요?ꡓꡒ오, 수남이로구나. 국원인 심부름 갔는데…… 왜 요사이는 놀러오디 않네. 좀 놀러 오라.ꡓ쟁반 위의 그릇이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그네는 우리들 가까이 엇갈려 지나갔다. 그 동안 사내는 고개를 외면하고 돌아서 있었다. 지나가자마자 사내가 내 손목을 놓고 여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국원이 큰누나가 걸을 때마다 연두색 치마가 한결같이 경쾌하게 흔들렸다.그때에, 우연이었는지 그네가 얼마쯤 가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어딘가 좀 미씸쩍다는 듯이 천천히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경쾌한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남매
ꡒ곡마단이 들어왔대!ꡓ학교에서 오는 길에 만난 목재소 집 정삼이가 바삐 뛰어오며 내게 말했다.ꡒ언제?ꡓꡒ어젯밤에, 지금은 쌍썽여관에 묵고 있댄다. 원숭이두 있더래.ꡓ나도 그애와 함께 뛰어가며 말했다.ꡒ그래, 쌍성여관으로 가니?ꡓꡒ아냐, 말집 텃밭으루 간다.ꡓ변사가 해설해주는 가설극장이나 약장수며 서커스가 우리 동네에 와서 공연할 곳은 말집 텃밭밖에 없었다. 말집이란 왜정 때 기마순경들을 위해서 군마를 먹이던 마구간이 있는 공터를 말했다. 나중에 그 자리에 학교가 섰다. 말집 텃밭은 곳곳에 잡초가 우거졌고 동네에서 내다버린 쓰레기와 인분이 널려 있었지만 우리의 놀이터로는 거기보다 더 좋은 데가 없었다. 정삼이가 말했다.ꡒ거기서 천막을 치구 있대. 오정때쯤엔 악대가 행진할 거야.ꡓꡒ구경거리가 많겠구나.ꡓ그애는 픽 웃고 나서 내게 핀잔을 주었다.ꡒ손님 모으러 다니는 행진을 봐서 뭘 하니, 초대권을 얻어야지.ꡓꡒ어떻게 공짜루 표를 얻어내니?ꡓꡒ거기 가서 일을 시켜달라구 하는 거다. 그럼 날마다 공짜루 볼 수도 있구 표두 여러 장얻는다. 늦으면 딴놈들에게 모두 뺏길지두 몰라.ꡓ말집 텃밭 위에는 벌써 가느다란 통나무로 천막의 골조가 세워지고 있었다. 곳곳에 가빠를 씌운 짐이 풀어지지 않은 채 널려 있고 조무라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원숭이, 비둘기, 토끼, 백마도 있었으며 사람의 말귀를 척척 알아듣는 영리한 개도 있었다.우리는 입을 벌리고 구경하고 서 있는 한떼의 꼬마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대를 엮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갔다. 정삼이가 말했다.ꡒ아씨, 시킬 일 없어요?ꡓꡒ응? 그래 마침 잘 왔다. 저기 하얀 운동모자를 쓴 무대감독한테 가봐라.ꡓ무대감독이 우리에게 일을 맡겼다. 정삼이는 잠시 후에 있을 행진에서 큰 북을 둘러메기로 했고, 나는 곡마단 아이와 풀통을 들고 포스터를 붙이러 나가기로 했다. 나는 화려한 일을 맡게 된 정삼이가 무척 부러웠다. 울긋불긋한 구제품 셔츠를 입고 앞 머리털을 계집애처럼 지져 넘긴 곡마단 아이가 내 짝패가 되었다. 그애가 묵은 포스터를 한뭉치 들고 왔다. 나는 무거운 풀통을 들고 그애의 앞장을 서서 동네 골목으로 나섰다. 석 장이나 붙일 때까지 그 녀석은 말을 하지 않았고 더구나 무거운 풀통을 나만 들게 했다. 드디어 기분이 나빠진 내가 풀통을 그 녀석에게 넘겨주며 말했다.ꡒ이젠 바꾸자, 팔이 아파 못 견디겠어.ꡓꡒ미안해.ꡓ의외로 그애가 아주 나약하게 대답하면서 풀통을 받아들었다. 그애는 얼마 못 가서 풀통 진 손을 바꿔 잡았다가 또 다시 바꿔 잡고 하면서 마침내 숨을 몰아쉬더니 멈춰 서서 쉬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이 좀 얄미워졌다.ꡒ참 형편없는 약골이구나. 그렇게 기운이 없니?ꡓꡒ넌 밥을 먹었잖아. 나두 너처럼 잘 먹으면 기운을 낼 수가 있다.ꡓ그애가 항의하듯이 내게 말했다. 나는 좀 너무했다 싶어서 곧 풀통을 마주 들어주면 물었다.ꡒ어디 아픈 모양이구나.ꡓꡒ아니야. 약간…… 배가 고파서 그래.ꡓꡒ밥 안 먹었니?ꡓꡒ아침부터 여태껏 대영빵 한 개 먹었을 뿐이야. 출연할 사람들은 밥을 나누어 먹고, 나 같은 아이들은 빵을 먹었어.ꡓꡒ어째서…… 곡마단은 돈을 많이 벌 텐데.ꡓꡒ그렇지두 않다. 우리 단장은 빚이 많대. 여러 사람들이 우리를 따라다니거든. 공연이 끝나면 그치들이 돈을 모두 거둬가버린다.ꡓꡒ단장이 네 아버지냐?ꡓꡒ아니, 나는 누나하구 고아원에 살았어. 줄 타는 아저씰 따라 곡마단에 들어왔다.ꡓꡒ그럼 다시 돌아가면 되잖아?ꡓꡒ너는 몰라.ꡓ그때 아이가 아주 행복한 눈초리가 되면서 웃었다.ꡒ얼마나 재밌는지 넌 모를 거야. 여긴 훨씬 자유스럽단다. 트럭을 타구 어디든지 간다구. 너는 바다를 못 봤겠구나. 우린 섬에두 간다.ꡓꡒ야, 바다에 가봤으면 좋겠다. 근데 자동차는 안 보이던데…….ꡓꡒ트럭은 지난달에 빚쟁이들이 가져갔어. 요새는 짐만 기차에 부치고 대개는 걸어다닌다. 그래두 감옥살이 같은 ꡐ소망원ꡑ 보다야 훨씬 낫지.ꡓ나도 그애의 쾌활해진 기분을 건드리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그애처럼 훨훨 떠다니며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으므로 부러워 못 견딜 지경이었다. 곡마단 아이가 작은 돌을 발끝으로 차면서 시무룩해져서 말했다.ꡒ걱정거리가 생겼어. 나는 누라랑 헤어지게 될지두 몰라. 다른 단체 사람들이 누나를 빚 대신 데려갈려구 그러거든.ꡓꡒ안 가면 되잖아, 너두 따라가든지.ꡓꡒ누나는 여러 거지 곡예를 한다구. 난 심부름밖에 못 하는 걸 뭐. 단장이 그랬어, 섭섭하지만 누나를 보내는 수밖엔 도리가 없대.ꡓꡒ느이 누나가 다른 데루 가면 너는 어쩔 작정이니?ꡓꡒ글쎄에…….ꡓ곡마단 아이가 고개를 위로 치켜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소매로 얼굴을 쓱 닦았다.ꡒ소마원으로 돌아가야지. 아무도 나를 먹여주지 않을 테니까.ꡓ우리가 시장 앞 네거리에서 우체국의 회색 담에다 포스터를 붙이고 있을 때 갑자기 곡마단의 행렬이 나타났다. 길게 끌며 까불어대는 나팔 소리와 걸음걸이에 맞춰 두드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단원들 모두 원색의 곡예복을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원숭이도 아장아장 걸어갔다. 군중들 틈에서 붉은 술이 늘어진 하얀 분꽃 같은 작은 몸집이 팔딱 튀어올랐다. 그것은 흰 무도복에 붉은 띠를 맨 소녀였다. 소녀가 멋지게 땅재주를 넘으면서 행렬의 앞으로 나갔다. 곡마단 아이가 풀붓으로 그쪽을 가리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ꡒ우리 누나다. 멋있지?ꡓꡒ정말 멋있다. 땅재주가 기막히다.ꡓꡒ땅재주가 아냐. 저건 아크로바트라는 곡예란다.ꡓꡒ아크로…… 라구. 근사하다.ꡓ목재소 집 정삼이도 붉은 원뿔 모자를 쓰고 북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맨 뒤에서 이상스런 화상을 얼굴에 그린 남자가 울긋불긋한 아기 옷을 입고 우스운 춤을 추며 삐라를 뿌렸다.ꡒ야! 저기 까불이도 가는데.ꡓꡒ까불이가 아니라, 도화역자라는 거야.ꡓ아이들과 어른들이 웃고 떠들며 삐라를 줍기도 하고 행렬의 뒤를 쫓아갔다. 우리는 빈 풀통을 들고 그 시끌작한 군중들의 뒤를 느릿느릿 따라갔다.나는 곡마단 아이와 은근히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의 분꽃 같은 누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서 장의 표를 받았고 못내 흥분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초대권이란 원래가 첫날 둘째날은 써먹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공연히 말집 텃밭에 지어진 곡마단의 천막 앞에 가서 서성거렸다. 오색 테이프와 만국기가 펄럭였는데 장막 안에서는 저 흐느끼는 듯한 나팔 소리와 손풍금 소리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몰려나오는 사람 중에서 학급 아이라도 만나면 나는 대뜸, 재미있게 하디? 하고 애타게 묻곤 했다.기다리던 날이 왔다. 초대권에 찍힌 날짜가 돌아온 것이다. 천막 안에는 가마니 냄새와 손님 중의 대부분인 아이들의 땀냄새, 어른들의 담배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마술, 접시 돌리기, 통 굴리기, 얼음줄타기, 원숭이 재주, 장대타기, 별의별 꿈같은 놀이가 계속되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분꽃 같은 소녀의 공중그네 타기가 있었다.나는 연속으로 두 번이나 보았고 그 소녀를 보기 위해 나중에 한 회를 더 보았다. 소녀가 줄사다리를 타고 천막의 꼭대기로 기어올라갔다. 네 개의 그네가 있었고 좌우에 어른 두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소녀가 이쪽 그네에서 저쪽 그네로 새처럼 날아갔다. 흰 무도복의 옷자락이 새의 꽁지처럼 펄럭였다. 낮은 그네에서 높은 그네로 그리고 다시 날아서 사뿐 낮은 그네 위에 올랐다. 거기까지는 중간에 그물을 받쳐놓은 채로 했지만 결정적인 마지막 곡예 때에는 그물을 걷어치웠다. 사람들은 숨도 죽이고 모두 조용해졌고 낮고 음산하게 두드리는 북소리만 들렸다. 소녀가 그네에 다리를 걸고 거꾸로 매달려 좌우로 흔들기 시작했다. 밑에서 감독이 얏! 하는 기합을 넣자마자 소녀의 몸이 팽그르르 재주를 넘으면서 기다리고 있는 어른의 팔을 향해 날아갔다. 붉은 띠가 공중에 팔랑, 나부끼는가 했더니 못 미치고 바람에 불린 꽃잎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튿날 나는 쌍성여관 앞에서 기다리다가 그 곡마단 아이를 만났다. 그애는 내게 속삭였다.ꡒ우리 누나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았다. 나 땜에 일부러 두 바퀴 더 돌았대.ꡓ공연이 끝나자 그들은 천막을 걷고 초라한 짐을 꾸려서 동구 밖으로 떠나갔다. 다리에 깁스를 댄 소녀가 남자 어른의 등에 업혀 있었고 이제는 헤어질 염려가 없게 된 동생이 그 옆에서 웃고 있었다.

잡초
그해 여름의 땡볕을 생각하면 지금도 혀뿌리에 끈끈한 침이 엉겨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집은 그 무렵에 제철공장과 방직공장 부근에 있는 영단주택 동네에 있었고, 밤에 창문을 열면 철도청 영등포 공작창의 찬란한 용광로의 불똥과 거뭇거뭇한 사내들의 벗은 몸집이 분주하게 불빛 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먼길을 달려온 기차가 지친 숨을 내뿜으며 공작창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매일 그맘때에 들렸는데, 그러고 얼마쯤 지나면 밤일을 나가는 남자들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던 것이다.요즈음에도 그 거리의 풍경은 어딘가 인적이 끊긴 삭막한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듬성듬성 서 있는 먼지 덮인 가로수며, 퇴색한 군복 빛깔의 시멘트 벽, 짓눌린 듯한 낮은 지붕들, 한산한 골목길과 검은 흙빛이 그대로다. 다만 아스팔트만이 반듯한데, 그때에는 움푹 팬 흙탕길 위로 밤마다 군용트럭이 지나가곤 했었다. 군데군데 풀밭과 폐수의 웅덩이가 못처럼 고여 있어서 녹색 거품을 내며 썩어가고 있었다. 키가 넘게 자란 잡초 속에 모기떼는 물론이고 사마귀나 송장메뚜기 같은 기분 나쁜 벌레들만이 우글거렸다. 트럭이 지나가면 규칙적으로 들리던 기관차의 김 빼 소리와 제철 공장의 쇠 부딪는 소리들을 뒤덮고 요란한 군가 소리가 ꡒ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사랑ꡓ 하면서 잠을 깨웠다. 지금 내게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은 먼 데서 들려오던 연발사격의 총성과, 부서진 창고 속에 앉아 무수히 새어들어온 흰 빛줄기 가운데서 꼬물거리며 떠오르던 먼지를 바라보던 일이며, 나직하고 힘있는 남자의 목소리와 짜릿한 느낌이 들던 여럿의 고함 소리들이다. 또한 무엇보다도 태금이의 이상야릇하게 썰렁했던 노래 곡조는 잊혀지질 않는다.아버지는 해방이 되자마자 생활에 무능해져버렸고 대신에 어머니가 살림을 억척으로 꾸려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무일푼으로 만주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어머니는 점령군 가족들을 상대로 양장점을 경영해서 우리 식구가 겨우 먹고 살았다. 남쪽에 내려와서도 어머니는 방직공장에 사무원으로 취직을 했으며 아버지는 사업을 한답시고 지방에 내려가서 며칠씩 돌아오지 않고는 했다. 어머니는 공장에 출근하고 누나들 둘은 학교엘 가야 했으므로 집과 나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어머니가 어느 날 키가 자그마하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땋아내린 처녀와 함께 퇴근해왔다. 몽당치마 아래 흰 버선을 신고 있던 그네는 나를 보자마자 번쩍 치켜올리면서 쾌활하게 말했다.ꡒ니가 수남이여? 온 지지바처럼 생겼구먼. 안녕하세요, 라구 인살해야지.ꡓꡒ태금이 누나란다.ꡓ어머니가 옆에서 소개를 했다. 태금이는 내게 줄 게 있다면서 보따리를 뒤적이더니 네모 반듯하게 썬 갱엿을 꺼내어 먼지를 치맛자락에 쓱쓱 문지르고 나서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고 여느 때처럼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가 마지못해 받으라고 말하자마자 나는 그네에게서 엿을 빼앗아 가졌다. 태금이는 금방 어머니께 눈을 흘기며 말했다.ꡒ아따 언니가 왜 이렇기 까다롭디야…… 누가 못 먹을 걸 주남유?ꡓ어머니는 또 동네 탓을 하면서 애 기르는 어려움에 관해서 그네와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부터 태금이가 좋아졌다. 어머니에게 대놓고 핀잔을 주는 사람을 처음 보았을뿐더러, 언제나 잘났다고 까불대는 누나들에게 호령을 했을 때에는 나는 완전히 태금이가 내 편이라고 믿게 되었다. 태금이는 좋은 나라였고 엄마와 누나들은 때때로 나쁜 나라였다.그전에 나는 늘 혼자 놀았다. 어머니와 누나들이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이웃집 여자에게 나를 맡기고 가버리면 나는 거의 한나절을 혼자 보냈다. 워낙에 주의가 단단했으므로 나는 그 집 마당 근처에서만 맴돌며 놀았다. 누나들은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제 친구와 놀러 가거나 해서 나를 상대하지 않았고 나도 여자애들을 무시해버렸다. 혼자서 숨바꼭질을 하거나 그것도 싫증나면 활석을 가지고 땅바닥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며 속으로 중얼중얼 설명을 하면서 놀았다. 어머니는 내가 옷 버리는 것은 딱 질색이었으므로 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조심해야 되었다. 나는 누나들의 원피스를 고친 셔츠나 모직의 윗도리를 입었고 반바지에 긴 양말을 신었는데 언제나 내 꼬락서니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상고머리를 길게 길러 가르마까지 타서 얌전히 빗어 넘겼으니, 나는 꼭 계집아이 꼴이었다. 동네의 내 또래 아이들은 나와 별로 친해지질 않았다. 어머니가 놀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그애들도 나를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혼자 집에 있는 날이면 누나들 그림물감으로 얼굴에다 수염을 그리고 보자기를 망토대신 쓰고 거울을 보며 장군놀이를 했다.태금이는 곧 내 기분을 알아차렸다. 그네는 나의 짝패였다. 나는 어머니의 대나무 매를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검은 빤쓰에 러닝만 걸친 차림으로 하루 종일 집에서 먼 곳까지 싸돌아다니다가 어머니가 돌아올 때쯤 해서 집에 오곤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ꡐ영공ꡑ의 기차 수리장으로 구경 나갈 수가 있었고, 석탄더미 위에 올라가 동네 애들과 연도 날리게 되었다.나는 아이들과 차츰 친해져서 비행장 근처로 메를 캐러 갔고, 고사떡을 얻어먹으러 다녔으며, 밭고랑에 뒹굴고 있는 제웅의 속을 빼먹는 짓도 알게 되었다. 태금이는 나를 데리고 신기한 곳만 찾아다녔다. 굿거리 구경을 가서 나는 태금이의 무릎에 앉아 무당이 작두 위에서 춤추는 것도 보았다. 시장에 가면 진창 위에 서서 소라나 우묵을 사먹었고 원숭이를 놀리는 약장수도 구경했다.ꡒ너는 똑 꾀주머니여 히힛.ꡓ어머니가 돌아오면 시치미를 떼는 내 모양을 보고 태금이는 속상이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태금이의 펑퍼짐한 등이나 투실투실한 넓적 다리께를 쥐어질렀다.ꡒ아이구…… 왜 쌔리냐, 왜 쌔려.ꡓ킥킥 웃으면서 그네가 내 코를 쥐어 비틀었고 나는 그게 더욱 재미가 나서 태금이를 때려주곤 했다.오줌밥이 끼어서 내 고추가 퉁퉁 불었던 적이 있었는데 태금이는 나를 함지에 세워놓고 씻어주었다. 그네가 내 고추를 잡고 씻는 바람에 뻣뻣해지니까 태금이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내 볼기를 철썩철썩 갈기면서 화난 얼굴을 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서 큰 소리로 울었다. 태금이가 나를 들쳐업고 공작창 앞 빈터로 바람을 쐬러 나갈 즈음에야 나는 울음을 그쳤다.언제나 우리가 거기에 가면 새 풀이 돋아나기 시작한 언덕에 앉아 빈터에서 배구하는 남자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건장한 체구의 직공들이 둥글게 모여서서 하늘 높이 공을 주고받는 게 보기가 좋았다. 점심시간 끝나는 사이렌이 불기까지 그들은 화들짝하니 웃고 떠들며 배구를 했다. 실수한 사람이 가운데 엎드려 있고 공을 치는 사람은 그 술래를 때리느라고 땅볼을 쳤는데, 그때마다 태금이가 큰 소리로 웃었기 때문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한번은 공이 우리 쪽으로 굴러온 적이 있었다. 태금이가 공을 집어들었고 청년 한 사람이 공을 쫓아 따라왔다. 얼굴이 새까맣고 키가 작은 남자였다. 몸집은 작았는데 목소리만은 굵직하고 점잖았다.ꡒ아가씨 좀 던져주쇼.ꡓ태금이가 공을 던져주었다. 태금이의 얼굴은 온통 자두처럼 붉어져 있었다. 우리는 이튿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도 공작창 빈터 앞 언덕에 갔다. 새까맣고 키가 작은 그 청년이 없는 날도 있었고 어쩌다 우리를 향해서 씽긋 웃어 보이는 날도 있었다.태금이는 그 무렵부터 살구씨 냄새가 나는 어머니의 크림을 몰래 바르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 한밤중이 될 때까지 태금이가 돌아오지 않아서 어머니가 일부러 찾아나섰던 때도 있었다. 태금이는 밥을 태우거나 그릇을 깨쳤으며 창문을 열고 바깥을 멍하니 내다보는 일이 차츰 많아졌다. 누나들 도시락 싸주기를 잊거나 빨래를 게을리한 탓으로 옷을 갈아입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으므로 드디어 식구들은 태금이에게 뭔가 심상찮은 변화가 왔다고 알아채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상을 찌푸리고 말했다.ꡒ아무래두 내보내든지 해야지. 달떠가지구 꼭 혼이 빠진 년 같구나.ꡓ그러나 태금이는 여전히 내게만은 전보다 더욱 잘해주었다. 밀 부침개를 부쳐준다든가 어머니 몰래 쌀을 퍼내어 떡도 해주었는데 나머지는 싸가지고 밖으로 내가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는 아직은 태금이의 편이었으므로 비밀을 지키기로 했다. 태금이는 어머니처럼 나를 이웃집에 맡기지는 않았지만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내 또래의 동네 꼬마들에게 나와 사이좋게 놀라고 타이르고는 어디론가 바삐 나갔다. 처음에는 나도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질을 쳤지만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게 차츰 재미가 생겨났다.우리는 녹슨 화물차의 골조를 쌓아놓는 곳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철재를 가득 실은 트럭의 행렬이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갔고 먼지 사이로 청년 두 사람이 도로를 건너갔다. 길 건너편에는 방직공장의 회색 담이 쌍성루 중국요릿집이 있는 네거리 모퉁이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쌍성루 뒤에는 널따란 거름 구덩이가 있었고, 땅콩밭 터가 있었는데 가끔 곡마단이나 약장수의 천막이 그곳에 세워졌다. 청년 한 사람은 풀통을 들고 있었으며 또 하나는 커다란 종이뭉치를 둘둘말아 팔에 끼고 있었다. 그무렵에 동네 부근의 기다란 담벼락마다 울긋불긋한 글씨를 쓴 종이가 붙여져 비바람에 바랠 때까지 너덜거렸던 것이다. 어렸던 우리들도 그것이 <조국의 어머니>나 혹은 <자유만세> 같은 활동사진이나 새로 들어온 악극단의 <아리아 공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는데 오히려 가까이 한다든가 찢어서는 더욱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청년은 좌우를 바삐 살피고 나서 담에다 글씨 쓴 널따란 종이를 붙이기 시작했다. 쌍성루 쪽에서 네댓 명의 남자들이 뭐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왔다. 종이를 붙이던 두 사람은 풀통과 종이를 들고 달아났다.우리는 술래잡기를 멈추고 그들의 싸움을 구경했으며 동네 아낙네들은 우리들 중의 몇몇을 데리고 황급히 집 안으로 사라졌다. 길 가운데서 부딪친 그들은 한편을 돌을 던졌고, 다른 한편은 몽둥이를 휘둘렀다. 몽둥이를 든 남자가 풀통 가진 사람의 머리를 때려서 피가 얼굴로 흘러내렸다. 그는 한길 가운데 넘어져버렸다. 다른 그의 동료는 종이뭉치를 버리고 달아났는데, 잠시 후에 대여섯 명의 청년들과 함께 그는 돌아왔다. 그들은 골목마다 뒤지고 큰길을 살펴본 다음 쓰러진 사람을 떠메고 가버렸다. 그때에 나는 맨 앞에서 사람들에게 이리로 가라 저쪽으로 쫓아가라, 큰 소리로 이르는 남자가 바로 공작창 빈터에서 보았던 얼굴이 새까맣고 키 작은 남자라는 걸 알았다. 우리네 꼬마들은 별로 무서워하지도 않고 그 모든 것들을 지켜보았다. 반장네 아이가 알은체를 했다.ꡒ다친 사람을 메구 간 어른이 누군 줄 아니? 뚝발이네 큰형이다.ꡓ나도 한마디 했다.ꡒ그래, 그 사람은 날마다 배구 뽈을 친다. 공작창서 대장이다.ꡓ푸줏간집 큰아이는 반대했다.ꡒ우리 형이 그러는데 뚝발이 형은 공장 그만뒀대. 까딱하면 유치장 갈 거래. 아주 나쁜 놈이라구.ꡓ그 뒤에도 나는 어른들이 골목이나 밭고랑에서 패싸움하는 모양을 여러 번 볼 수가 있었다. 태금이가 우리집에 온 지 석 달이나 지나서 지방에 내려가 있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피곤한 얼굴이었고 장사는 몹시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세상이 점점 어지러워져간다는 얘기였다. 남쪽에서는 버스도 마음놓고 타고 다니지 못한다고 어버지는 실패한 장사에 관해 변명을 늘어놓았다. 어머니도 회사 이야기를 하면서 세상이 모두들 이쪽 저쪽으로 패를 갈라 싸움질뿐이라면서 얘기가 태금이에게까지 이르렀다. 어머니는 말했다.ꡒ이건 처녀애들까지 궁둥일 들썩이게 만드는 세상이에요. 마루보시 다녔다는 주정뱅이 목수 영감 아시죠? 태금이 상대가 바로 그 집 큰아들 녀석이래요. 걔가 공작창서두 말썽을 일으켜서 지난달에 쫓겨난 아이래요.ꡓꡒ왜 인사성 바르구 똑똑하던데.ꡓꡒ사람이 제 분수를 알아야죠. 요즘 얼마나 무서운 세상이라구…… 태금일 내보내나? 어쩌지, 내가 시골서 그애 오빠에게서 부탁까지 받았는데.ꡓꡒ당신이 여공 자리라두 없나 알아보구려.ꡓ어느 날 나는 둑 너머 비행장 근처로 아이들과 함께 채를 가지고 송사리를 건지러 갔다. 물풀 아래 으슥한 기슭을 훑으면 손가락만큼씩 굵은 송사리들이 걸려나왔다. 아직 물은 차가웠지만 모래는 제법 따뜻했다. 극성스런 몇 아이들이 물에 들어가 첨벙대다가 오들오들 떨며 나와서 모래에 드러누워 일광욕을 하기도 했다. 요란한 시동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다가 우리 머리 위로 번쩍이는 새 같은 연습기가 시원스럽게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해가 뉘엿뉘엿할 즈음에야 나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났는데 신고 왔던 파란 운동화가 보이질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다 돌아가버린 다음에도 오랫동안 신발을 찾아 물가를 헤맸다. 어두워지니까 귀신바위 쪽의 검푸른 물 속에서 뭔가 나올 것만 같았고, 둑 밑에 키만큼 자란 거무칙칙한 수수밭이 바람에 불리는 소리 때문에 억지로 노래를 하면서 둑으로 퇴각했다.시바까리 나와나미 짚새기를 삼아서 장에 갖다 팔았더니 십전밖에 안 남아, 오전은 떡 사먹고 오전은 짚 사고……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아름다운 역사 반만년……. 하는 누나들의 고무줄 노래를 부르면서 둑으로 올라갔다. 둑을 넘어 가려는데 어둠 속에서 뭔가 검은 것이 펄쩍 일어났다. 나는 그것들은 일부러 못 본 체 피해 가면서 목청을 더욱 드높였다.ꡒ수남이 아녀? 워딜 갔다가 오는 겨, 누나가 시방 찾으러 왔어.ꡓ태금이 누나는 남자와 함께 있었다. 동네 애들에게서 남자랑 여자랑 그 둑길에 나와서 연애를 건다는 얘기를 여러 번 들었어도 나는 그게 뭔지는 몰랐다. 하여간 이런 데서 남자랑 같이 있는 태금이 누나와 마주치게 된 게 부끄러웠다. 태금이는 싫다는 나를 막무가내로 업었다. 우리는 둑길을 걸어 철교가 보이는 곳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곳은 우리 동네의 길 건너편 쪽에 있는 창고 동네였다. 부서진 창고들이 똑같은 모양으로 늘어서 있었는데 우리보다도 훨씬 가난한 사람들이 그 창고 몇 채를 차지하고서 칸막이를 하고 살았다. 우리는 그 지저분하고 어두운 동네로 들어섰다. 창고 안은 컴컴했고 칸막이 마다에서 희미한 감빛 불빛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남자네 집으로 들어서는 걸 알았다.ꡒ지금 오냐?ꡓ기침 섞인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방은 하나였는데 그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찬 것으로 보였다. 나는 태금이의 저고리 자락을 꽉 붙잡은 채 그네 등에 업혀 있었다.ꡒ색시가 웬일이야, 어서들 들어오너라.ꡓ노인과 나란히 문간에 앉았던 늙은 부인이 말했다. 나는 태금이의 등에서 내렸다. 방에는 노부부 외에도 중년 부인과 남자의 동생인 듯한 소년과 나보다 두어 살 위일 성싶은 아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온식구가 봉투 붙이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도 사방에 널린 종이 때문에 방 안이 가득 찬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ꡒ허 고놈 참 귀엽게 생겼다.ꡓ담배 쌈지를 뒤적이던 노인이 또 가래 섞인 목소리로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구석에 앉아서 될 수 있는 대로 태금이의 등뒤에 숨으려 하면서 방 안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알 수 없이 퀴퀴하기도 하고 구수한 것도 같은 냄새가 났다. 남폿불의 그을음 때문에 눈이 아팠다. 그집 식구들은 모두들 표정이 비슷했으며 입을 꾹 다물고 두 손만을 부지런히 놀리고 있었다.ꡒ뭐 줄 게 잇어야지 쯧쯧.ꡓ딱하다는 듯이 중년 부인이 혀를 차면서 일어나 선반 위를 더듬으며 부스럭거렸다. 비스듬히 앉아서 종이를 자르던 소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ꡒ에이 엄마두 그걸 걔가 먹겠수?ꡓꡒ아니야 맛이 제법이다 뭐.ꡓ부인이 내게 이상스런 음식을 주었다. 약간 짭짤하기도 했고 씹는 맛이 꺼끌꺼끌했다. 나중에 전쟁이 일어나 시골로 갔을 때 나는 그것이 개떡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내 또래의 아이는 다리를 절었다. 오른쪽 다리가 갓난아이 다리처럼 가냘프게 휘어져 있어서 걸을 때마다 허리를 크게 흔들고 두 손을 내저었다. 그애도 개떡을 먹으면서 태금이 누나 맞은편에 앉아 적의에 가득 찬 시선으로 나를 살폈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석탄더미 위에 와서 연을 날리던 아이였다. 땅바닥에 꼴아박힌 연을 주우러 갔을 적에 아이들이 그애의 절뚝이는 박자에 맞춰 노래를 부르던 일도 생각났다. 그애가 나에게 낮은 소리로 으르렁 거렸다.ꡒ너 영단 살지? 다 안다. 우리 동네서 걸리면 넌 국물두 없을걸.ꡓ그애는 공연히 내 등을 툭툭 치거나 밀기도 하면서 집적거렸기 때문에 나는 불안했다. 노부부는 쉬지 않고 봉투를 붙이면서 한참씩 사이를 두고 태금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다시 자기 아들의 눈치를 살피곤 하는 것 같았다. 노인은 거세게 연속적인 기침을 터뜨리다가는 무지무지하게 큰 소리로 가래를 뱉어냈다. 종이를 자르고 있는 소년은 태금이 쪽을 보면서 공연히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부인이 말했다.ꡒ얘, 내가 말할래다 잊고 있었다. 그래 어쩌자구 일은 않구, 쓸데없이 어울려 다니는 거냐? 아까두 한떼거리 몰려왔었어.ꡓ형이 동생에게 물었다.ꡒ누가 왔었니?ꡓꡒ공장에서지 뭐.ꡓ소년은 말하면서 대꾸하지 말라는 듯이 자기 형에게 손가락을 입술에 세워 보였다. 부인네가 투덜댔다.ꡒ재취업할 생각은 않구 어쩌자구…… 그 녀석들 또 삐란지 뭔지를 잔뜩 갖다가 맡겨놓길래 저기 쑤셔박아두었어. 느이들 하는 꼴 봐선 아궁지에 처넣구 싶더라만, 느이 애비두 그러다 죽구…….ꡓꡒ아아, 시끄러! 그만 좀 해라.ꡓ침묵하고 있던 노인이 소리를 꽥 질렀다. 그는 외치고 나서 가래침을 칵 뱉었다.내가 집에 돌아갔더니 어머니는 걱정을 하고 있었지만 신발 잃어버린 데 대해서는 전혀 야단을 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날 태금이를 앉혀놓고 뭔지 오랫동안 얘기를 했는데 나는 잠결에 태금이가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를 들었다.신학기인 오월부터 학교에 나가게 되어 벌써부터 나는 책가방과 공책 연필 필통 크레용을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동네 한길가에 줄지어선 가죽나무에서는 연두색의 콩잎 같은 꽃이 피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뒤따라 영단 끝에 있는 공장장네 이층집을 둘러싼 울타리의 아카시아꽃이 아이들의 입맛을 돋우었다. 비가 자주 내렸다.내가 입학을 했던 날도 가랑비가 왔다. 그날은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작은 일들까지도 기억이 생생하다. 새 가방의 가죽 냄새와 끝을 뾰죽하게 깎은 고운 색깔의 연필과 교과서의 아름다운 그림들, 그리고 교정에 가득 찬 버드나무에선 싱싱한 비린내가 났고 땅바닥에 무수한 물방울 자국들이 뚫어져 있었다. 낡은 풍금 소리와 여선생의 경쾌한 호각 소리, 우리들 가슴에 매달린 하얀 손수건, 교실에 들어썬을 때 책상에서 풍기던 칠 냄새로 골치가 아프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아이들의 떠드는 소음 때문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귓구멍을 막았다가 열었다가 하면서 웅성대는 소음이 내 안팎으로 밀려왔다가 나가게 하는 놀이를 혼자서 즐겼다. 떠드는 아이, 웃는 애, 싸우는 녀석, 우는 놈들을 자세히 관찰하노라면 갑자기 그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과 동무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복도 밖에선 태금이가 따라와서 수업이 파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태금이는 그날따라 곱게 화장을 했는데 어머니의 양장 차림에다 살색 양말까지 신고 있어서 우리 여선생님보다도 훨씬 예뻐 보였다. 태금이는 곧 취직을 하게 되어 우리집을 떠날 예정이었다.교문 밖을 나서자 지우산을 쓰고 기다리고 섰던 뚝발이의 큰형이 우리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어쩐지 그 남자가 태금이 누나를 데려가버릴 것만 같아서 싫고 무서웠다. 그의 표정은 전보다 더욱 침울해 보였다. 그들은 내 양쪽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내가 태금이 쪽으로 빠져나가려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면 그 남자는 손을 꽉 조여잡고 나를 내려다보며 씽긋 웃는 것이었다. 흙탕물 있는 곳을 지나면서 둘은 간혹 나를 위로 번쩍 치켜들곤 했다. 남자가 집을 떠나겠다고 말을 한 것 같고 태금이가 뭐라고 부지런히 남자에게 사정조의 만류를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태금이의 얼굴이 울상인 것을 보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뚝발이 형이 미웠다.ꡒ지는 얘를 데려다줘야 할 텐디 어쩌쥬…….ꡓ하면서 그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ꡒ집에 가면 언니가 못 나가게 허는디.ꡓ남자가 들어가보라고 말했고 태금이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ꡒ수남아 너 누나랑 아저씨랑 같이 놀러 갈텨, 아님 집 앞에까지 데려다줄 테니께 혼자 들어갈래?ꡓ나는 태금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발을 땅에 붙이고 서서 완강하게 고개와 몸을 흔들었다. 태금이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마주 보았다.ꡒ아마 잘될 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ꡓꡒ아녜유, 저 돈 있는디 구경두 하구 청요리두 사디릴께유. 수남이두잉?ꡓ우리와 헤어져 가려는 남자를 이번에는 태금이가 꼭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우리들은 여성국악단의 <자명고>라는 창극을 구경했다. 나는 별로 시큰둥한 느낌이었지만 나올 때 보니까 태금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이튿날 나는 여러 사람들의 합창 소리에 잠이 깼다. 창 밖으로 공작창 앞에 모여든 남자들이 뭐라고 크게 외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두어 시간쯤 지나니까 남자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그들의 고함 소리에는 어딘지 열기가 섞여서 후텁지근한 입김의 바람이 온 동네를 뒤덮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현관을 꼭 잠그고 조심스럽게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지만, 태금이는 이미 길 밖에까지 나가서 동네 사람들 틈에 파묻혀 있었다. 군중들 틈에서 서서히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곧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뒤엉클어졌다. 군중들 사이에서 패싸움이 일어난 것이었다. 길가에까지 나가 있던 동네 아낙네들은 호들갑스런 비명을 지르면서 골목 안으로 쫓겨 들어왔다. 사람의 떼가 차츰 흩어지고 걷혀가기 시작하자 돌연 무기를 든 청년들이 군중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뒷전에는 두 트럭이나 몰려온 순경들이 합세하고 있었다. 저런, 아유 끔찍해! 어버지와 어머니는 유리창 밖을 내다보면서 연방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늘비하게 길바닥에 쓰러졌다. 길가 집의 유리창과 장독들이 돌팔매로 모두 깨져버렸다. 우리집 유리창도 몇 장이나 깨어졌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며칠 동안 동네에는 경비를 서는 순경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러 사람이 체포되었고 뚝발이네 큰형도 잡혀갔다는 소문이 돌았다. 며칠 뒤에 학교 갔다 돌아오니 태금이는 견습여공으로 취직이 되어 우리집에서 나갔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홀가분하다고 말하면서도 남자네 남은 식구들을 걸머지게 될 태금이가 가엾다고 했다. 달반이 지나갔다. 그 동안에 나는 학교생활에 재미를 붙여 태금이에 관해서는 새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어머니 말을 들으면 뚝발이 작은형이 태금이의 더운 도시락을 갖고 공장에 들른다는 것이었다.오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역전 부근에서였다. 조종사가 보일정도로 낮게 뜬 비행기가 굉장한 폭음을 울리며 날아왔다. 길 가던 사람들이 모두들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불빛이 번쩍, 하더니 역사 쪽에서 유리창들이 일사에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검은 연기가 솟았고 불꽃을 올리며 건물이 타기 시작했다. 길에 서 있던 사람들은 길가의 건물들 아래 바짝 붙어서 뛰었다. 내가 멍하니 서서 역을 보라보고 있는데 행인 중의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ꡒ얘, 빨리 피해라. 폭격이다, 죽는다.ꡓ비행기가 되돌아왔다. 날개를 좌우로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막대기로 마룻장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직도 멀기만 한 집을 바라고 뛰었다. 집에 와서야 난리가 났다는 걸 알았다. 나는 공포와 호기심이 반반이었다. 피난민들이 동네 앞길로 꾸역꾸역 밀려갔지만 우리 식구는 안절부절못하며 늑장을 부리다가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리고 말았다.낯선 군인들이 별 전투도 없이 우리 동네로 조용히 진주해왔다. 새벽에 육중한 쇠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들었던 날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주검을 보지 못했으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가고 포성이 들려오는 것으로밖에 난리를 실감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른에 보호되어 있고 그런 형편에 대해서 전혀 무방비하고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처럼 무참하게 깨어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커서도 어른들이 그때의 난리 얘기가 나오면 밤새는 줄고 모르고 끊임없이 체험담을 엮어나가는 많은 경우를 보았다. 그런데 우리 또래들은 개개는 몸이 불편할 경우 그 시절의 경험을 악몽으로 꾸는 것이다.한동안 보이지 않던 청년들이 동네에 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고 나는 완장을 친 남자들과 군인들이 공장으로 바삐 드나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에 태금이가 우리에게 찾아왔던 것이다. 태금이를 대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는 냉정하면서도 지나치게 예의를 갖추는 것 같았다. 태금이는 우리집에 처음 왔을 적의 쾌활함을 완전히 회복하고 있었다. 그네는 처음처럼 내 겨드랑이에 팔을 껴서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어머니가 뭔지 태금이와 오랫동안 속삭였다. 돌아가는 태금이를 어머니가 먼 데까지 따라나가며 얘기했다. 나는 누나들이랑 마루에서 부모들의 얘기를 엿들었다.ꡒ아무래두 당신 먼저 시골루 가셔야겠어요.ꡓꡒ이 동네서 인심 잃을 짓을 한 적이 없는데 별일 있을라구.ꡓꡒ그런 게 아녜요. 어떻게든 협조를 해얀다지 않아요? 나중 일을 봐서라두 먼저 가 계세요.며칠 있다가 내가 애들 데리구 살며시 빠져나갈 테니.ꡓ나는 늦게까지 자지 않고 기다렸는데 누나들도 아직 잠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가는 소리. 어머니가 속삭이는 소리. 그러고는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어머니와 누나들과 나는 그날따라 한방에서 같이 잤다.우리 식구들은 시월 중순께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시골 피난생활을 하는 동안에 나는 꽤 무감각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어른들 뒤를 따라 타박타박 걸으면서 먼지 나는 신작로 위에서 내가 본 것은 하얗게 내리쬐는 땡볕과 죽은 개처럼 부패하고 잇는 사람의 시체들이었다. 간장을 끓이는 것과 비슷한 냄새가 났고 혼자서 아무 데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나는 우리 동네 밭고랑이나 수챗구멍에서 보았던 쥐새끼의 시체를 대하던 버릇대로 침을 뱉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지금도 내게는 죽음이 뜨거운 뙤약볕과 직결되어 있고 점액질과 같은 끈적한 느낌 가운데 있는 듯이 여겨진다. 그 끈끈한 죽음의 느낌은 세계가 화려하게 번창하고 있는 여름의 열기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우리 동네뿐 아니라 온 거리의 곳곳이 파괴되어 있었다. 한 달 반은 그런 시절에는 너무 긴 시간이어서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불탄 자리로부터 쓸 만한 것들을 추려내거나 소식 없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재빨리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뚝발이네 식구들에 관한 얘기는 아직도 남아서 돌아다녔다. 공작창은 진작에 폭격으로 타버리고 수복 전날의 맹렬한 포격으로 방직공장도 모조리 파괴되어버렸다. 공장 앞 빈터 언덕에 총살당한 이들의 시신이 일렬로 늘어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내 또래의 뚝발이를 포함한 그애네 식구 전부가 있었다고 했다. 부역자 가족이라고 치안대 청년들이 그렇게 했다고도 한다.우리가 멀리 남쪽으로 두번째의 피난을 다녀온 이듬해까지도 태금이는 동네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부서진 공장터와 집터마다 잡초가 을씨년스럽게 자라났으며 아이들 사이에서는 한창 불놀이와 전쟁놀이가 유행하고 있었다. 고여서 썩은 웅덩이마다 장구벌레가 득시글거려서 모기가 유난히 극성을 부렸는데, 사람들은 모기도 난리를 닮는다고 투덜댔다. 모기는 그해 여름에 먼 데서 돌아온 동네 사람들의 피를 빨아 오랜만에 살이 쪘을 것이다.전쟁놀이를 하노라면 아이들은 예전과 달랐다. 그전에는 땅, 하고 쏘면 제자리에 잠시 쪼그려 앉거나 손을 들고 서 있는 법이었는데 이제는 목을 뒤로 꺾고 땅 위에 벌렁 나뒹굴어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정한 계급을 엄중히 지킬 줄을 알았다. 내가 너보다 높잖아, 하면 곧 기가 죽어서 항의를 그치는 것이었다. 그래야 진짜 같으니까 그랬을까.어느 날 정오 무렵에, 아이들이 가죽나무 그늘에 앉아서 무더위에 헐떡이고 있는데 다 떨어진 남자 양복바지에 두꺼운 겨울 군복을 걸친 거지 하나가 도로의 가녘을 곧장 따라서 걸어왔다. 누군가 장난삼아 돌을 던져봤지만 그는 우리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머리까지 짧아서 남자인가 했었는데 여자가 분명했고 표정이 온전치가 않았다.ꡒ미, 미친년이다, 미친년!ꡓ드디어 한 아이가 환희에 가득 차서 숨막힌 듯이 외쳤다. 아이들은 이빨 사이로 웃음을 씹으면서 미친 여자를 따라갔다.태금이의 옛 모습은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딴 세상에서 온 것 같은 무서운 얼굴이었다. 앙상하게 마르고 볕에 그을은 얼굴 가운데서 눈만이 번들거렸다. 나는 가슴을 졸이며 태금이 앞에서 똑바로 바라보았으나 그네는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어머니도 그 꼴을 보고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울었다. 태금이는 영혼이 없어져버린 듯한 얼굴로 온 동네를 매일 쏘다녔다.사람들은 차츰 그네를 알아보는 모양이었지만 역시 반응은 냉담했다. 기억을 떠올리기에 지쳐 있었고 고작해야 난세에 흔한 일이라는 식이었다. 태금이는 황혼 무렵이면 방직공장의 무너진 담을 지나 폐허가 된 공작창 앞 언덕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네는 작고 희미한 목소리로 군가조의 노래를 부르다가 땅거미가 완전히 내려덮이면 자기 잠자리로 돌아갔다. 한번은 내가 그 방직공장 폐허의 기둥과 지붕 일부분만이 남은 벽돌 건물 가까이 태금이의 모습을 살피러 갔던 적이 있었다. 참새들이 시끌직하게 울어서 나는 깊은 산골짜기에라도 들어선 느낌이었다.태금이는 끼진 벽돌 쪼가리와 휘어진 철근 사이에 서서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뚫어진 천장 사이사이로 푸른 하늘이 엿보였다. 태금이는 여러 줄로 꽂힌 햇살 가운데 그런 모습으로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그해 늦가을까지 사람들은 저녁 먹을 즈음하여 그 미친 여자의 음산한 군가 소리를 듣곤 했다. 불쌍한 년, 해질 무렵에는 더 환장하는 모양이야, 라고 모두들 얘기했다. 노을을 배경으로 검은 음영만이 떠있는 꼴은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지만, 무너진 공장 건물처럼 거기 늘 있던 풍경이어서 나중에는 사람들 눈에 유별나게 보이지는 않게 되었다.

 

# 이해와 감상1943년 생인 작가 황석영이 10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전쟁을 겪었고, 그 빛과 어두움을 어린 눈으로 목격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아이의 눈으로 본 전쟁의 기억에 대한 술회와 성장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이다. 『모랫말 아이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작가 특유의 글맛이다. 장황한 설명이나 감상을 배제한 간결한 서술과 사건 중심의 속도 있는 이야기 전개는 행간의 뒷이야기를 독자의 가슴에 깊이 새기게 만든다. ‘어른을 위한 동화’이기도 하지만 빼어난 유년기 체험이, 꽉 짜인 이야기의 힘과 서정의 울림을 강하게 준다. 이 작품은 현대문학의 대가 황석영의 거침없는 필치와 탄탄한 서사구조, 고도로 절제된 서정 미학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아이와 어른 모두를 위한 동화의 전범이라 할 수 있겠다.
낡고 쓸쓸한 느낌이지만 어딘지 추억을 한껏 빨아들인 듯한 삽화를 곁들인, 작가 황석영의 어른을 위한 동화. 6·25 전쟁 직후 모랫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저자의 자전적 유년시절 회고담이다. 사회는 어수선하고, 물질은 늘 부족했지만 철없는 아이들의 생활은 즐겁고, 때로는 자라나는 아픔을 겪기도 한, 그 시절을 지나온 어른이라면 공감할 만한 옛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이상희의 『깡통』에서 거친 듯 하지만 따뜻함이 배어나오는 그림을 보여주었던 김세현이 ‘모랫말 ’의 정경을 삽화로 실어 이야기의 맛을 더해주고 있다. 『모랫말 아이들』은 전체가 10개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서울 한강변의 ‘모랫말’. 아직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은 그곳에서 작가의 분신으로 보이는 소년 수남이가 화자가 되어,‘모랫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먼 데서 혼자 흘러들어와 모랫말에 꼼배 다리를 만들어놓고 홀연히 사라진 ‘땅그지 춘근이’. 아이들은 그를 꼼배라 불렀다. 마을사람들의 외면 속에서 아내와 핏덩이 갓난애를 잃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그가 남긴 건, 원한이 아니라 근사한 돌다리, 꼼배 다리였다.

엄마의 친구가 양공주로 떠나면서 맡기고 간 혼혈아 ‘귀남이’. 유리 구슬 같은 초록 눈빛에 구불구불한 곱슬머리, 오똑한 코의 예쁜 소녀는 어린 수남이의 가슴에 설렘과 슬픔을 동시에 안긴다. 귀남이 마을의 신부님에게로 가게 되었을 때, 수남이의 손에 쥐어준 금색 멕기의 낡은 쇠단추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따뜻했다.

전쟁 때 중부전선에서 파편을 맞고 바보가 된 인정 많은 상이군인, 전쟁의 화염 속에서 수많은 시체를 불태운 화장터의 화부 아저씨, 낯선 이국땅에서 늙은 고양이를 벗삼아 외로움을 달래는 화교 친이 할머니, 상두네 술도가 노인의 재취댁과 애틋한 연정을 나누던 삼봉이 아저씨, 기지촌에서 양공주들과 함께 생활하는 수남이의 마음속 애인 영화, 검둥이 병사를 상대로 벌거숭이가 되어 돈벌이를 하는 영화의 엄마, 늘 배고파하며 떠돌아다니는 곡마단의 수줍은 어린 남매, 그리고 수남이를 돌봐주던 태금이 누나. 전쟁통에 미친 여자가 되어 모랫말로 다시 돌아와 영혼이 없어져버린 얼굴로 동네를 쏘다니던 태금이 누나의 애절한 사연들은 혹독한 현대사의 아픈 풍경이기도 하지만 무한한 삶의 비밀을 품고 있는 모든 유년에 대한 아름다운 송가이기도 하다.

“지금 어른이 되어 나는 알고 있다. 삶은 덧없는 것 같지만 매순간 없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며 따뜻함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아이들과 어른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하여 오늘도 여러 마을과 거리 모퉁이에서 살아낸 시간들을 기억시키고 싶다.”

암울한 시절, 질곡의 현대사로 남겨진 그 시절에도 사람들은 존재했고, 척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일구는 삶은 여전히 따뜻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를 진정한 우리이게 하고, 내일을 희망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바로 그 그늘진 세월을 꾹꾹 밟고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닐까. 작가 스스로 그 힘을 굳게 믿고 체현해왔기 때문에 황석영의 여러 작품들 속에 그토록 건강한 의식의 인간 원형이 창출되었던 것이 아닐까. 『객지』의 동혁이나 『삼포 가는 길』의 영달, 백화와 같이 한 시대의 전형이 되어 늘 우리 곁에 있는 인물들. 그들과 함께 살아온 우리 시대의 모든 유년이 『모랫말 아이들』의 이야기 속에 아프지만 아름답게 복원되어 있다.

“우리를 키운 비밀의 거의 전부는 우리가 아이들이었던 때의 바람과 달빛 속에 감추어져 있다. 우리를 가슴 설레게 했던 모든 것들, 우리의 놀라움과 기쁨, 사랑의 경이, 그리고 무언가를 알게 된 순간의 슬픔과 은밀한 눈빛……. 이 비밀스런 것들이 아이를 키우고 어른을 지탱하고 사람을 사람이게 한다. 황석영의 『모랫말 아이들』은 그런 비밀 보따리의 하나이다. 거기서 우리는 마치 처음인 것처럼 우리 자신을 다시 만난다”는 도정일 교수의 헌사처럼 작가 황석영, 그리고 우리 시대 모든 어른들의 비밀스런 유년이 『모랫말 아이들』의 이야기 보따리 속에 담겨 있다.
  # 핵심 정리
·갈래 ; 중편소설, 성장소설, 장편동화
·배경 : 시간-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대. 공간-서울 한강변의 ‘모랫말’.
·구성 : 옴니버스 구성(10개의 짧은 이야기의 연작 형태)
·제재 : 모랫말에서 보낸 어린 시절
·주제 : 어렵고 힘들었던 유년에 대한 추억과 잔잔한 정에 대한 그리움.
  # 등장 인물
·수남 : 기지촌 양공주와 함께 생활하는 어린 소년으로 화자이다. ‘모랫말’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잔하게 들려준다.
·꼼배 : 다리 밑에 사는 거지 아저씨.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지만 착하고 순하다.
·태금이 : 수남이를 돌봐주는 식모 누나. 전쟁통에 미쳐서 모랫말로 다시 돌아와 무표정한 얼굴로 동네를 쏘다닌다.
·친이네 : 중국인 가정으로, 할머니는 고양이를 벗삼아 이국땅의 외로움을 달랜다.
·삼봉이 : 상두네 술도가 노인의 재취댁과 애틋한 연정을 나누는 로맨티스트.
·귀남이 : 러시아 튀기. 수남이의 첫사랑의 대상으로 예쁜 소녀이다.
·곡마단의 남매
·영화네 : 수남이의 마음속 애인 영화, 검둥이 병사를 상대로 벌거숭이가 되어 돈벌이를 하는 영화 엄마와 영화.
·상이군인 : 전쟁통에 중부전선에서 부상을 당해 바보가 된 인정 많은 상이군인아저씨.

 

출처 : 네이버지식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07&docId=56039771&qb=66qo656r66eQIOyVhOydtOuTpCDspITqsbDrpqw=&enc=utf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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