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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칼럼 [결국 선생님들뿐입니다]를 읽고(글 신호현)

원 시 인 2013. 5. 13. 23:43

<조선일보를 읽고>

조선일보 칼럼을 읽고.hwp

사내 칼럼 [

결국 선생님들뿐입니다]를 읽고

 

 

 

    조선일보 513일자 사내 칼럼 [결국 선생님들뿐입니다]를 읽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학교폭력 해결의 주체가 선생님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 근거로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폭력·담배·휴대폰 없는 '3() 운동'을 펼쳐 왕따와 폭행이 1년 새 거의 근절됐다는 서울 신명중의 사례를 직접 취재했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은 전문 상담사 3명을 고용했다는 전제이다.

    체벌을 못 하게 한다고, 학생 수와 잡무가 너무 많다고, 학부모의 극성이 두렵다고 교사가 포기해선 안 된다. "부모가 못하는 일을 선생이 어떻게"가 아니라 "선생이 해야 하고 선생이 할 수 있다"는 의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수의 임무보다 교사의 임무가 막중하다고 평가하고 교사의 자긍심을 키워주기 위해 과감한 지원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기사를 읽고 첫째, 선생님을 존중하는 분위기는 선생님을 가리키는 용어 선택의 신중함이 요구된다. 신문은 공적인 글이라 대개 존칭을 생략하여 이순신 장군이순신으로, ‘○○ 대통령○○ 정부또는 영어 이름 첫 자를 따서 ○○ 정부로 부르니 일반인들도 ○○ 정부또는 ○○ 정부라 하고, 아이들은 그냥 이름만 부르거나 심지어는 욕을 하기도 한다.

    교사나 교수는 직업이다. 그래서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교수님이라 하면 존칭에 어긋나는 호칭이다. 그런데 많은 대학생들이 자기를 가르치고 깨우쳐주는 선생님교수님이라 하고 있다. 사회에서 선생님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면 본문 칼럼에서처럼 교사라거나 선생이라 하면 안 된다. 신문의 칼럼은 공공성을 가지지만 공적일수록 더욱 선생님이라 해야 한다.

 

   둘째, 정작 학교 문제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이 학교 폭력이든, 스마트폰 문제이든, 흡연이든 간에 학교 문제를 선생님들에게 맡기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교육이 지자체로 넘어가면서 교육감 선거의 공약 때문에 교육이 흔들리고 있다. 현실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채 어느 한 개인의 허황된 꿈을 실현시키려 검증되지 않은 정책을 지시하고 외국에서 잘 된다고 뿌리도 없이 잘라와 우리 교육에 심으려는 정책이 그동안 얼마나 실패를 거듭했던가.

    요즘 심화되는 학교 폭력의 문제도 그렇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주체로 선생님은 때로 경찰도 되고, 검사도 되고, 변호사도 되고, 상담가도 되고, 의사도 되고, 엄마도 되고, 아빠도 된다. 선생님이 아이들을 체벌하면 경찰 대신 공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선생님들은 학생이 불이익 받지 않게 변호도 하고 때론 도둑 사건이 벌어지면 도둑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선생님은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청소도 잘한다. 선생님은 만능이다.

    그런데 요즘 선생님의 체벌을 금지하고 학교폭력은 경찰에 신고를 해서 사법에 입건하여 경찰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심문하고 심한 경우는 연행해 간다. 학교에서는 학생의 처벌 내용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하여 상급학교 진학에 제한을 두고 있다. 학생은 그야말로 미성숙한 존재로 실수를 거듭하면서 성숙해져 어른이 되는 것이다. 선생님의 꾸중과 종아리 몇 대만으로도 충분히 개과천선(改過遷善)할 수 있는데 학교에 경찰이 들어오고 상담자가 들어오고, 변호사가 들어오고, 의사가 들어온다.

    선생님은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다. 아이들 싸움이 벌어지면 상담실에 보내기 전에 피해 학생이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이 와서 조사를 시작한다. 담임선생님이 안타까운 마음에 나서서 중재하고 화해를 시키려 하면 학교에서 가해자 편을 들어 준다고 다시 선생님을 원망한다. 예전에는 피해 학생이 보는 앞에서 호되게 회초리를 대면 가해 학생을 반성을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잘못을 반성했으며, 피해 학생은 간접 효과를 통해 심적으로 보상을 받아 용서하고 화해를 했다. 그런데 상담으로만 화해시키려면 피해 학생과 학부모는 더욱 화가 나서 선생님을 고소하고 원망한다. 그러니 선생님은 더 이상 역할이 없는 것이다.

 

    셋째, 이제 다시 선생님이다. 교육의 문제는 온전히 선생님들 손에 맡겨야 한다. 그리고 선생님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교육이 산다. 교권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곳까지 왔다. 언론이 선생님들을 지켜줘야 하고 학부모들이 믿어줘야 한다. 개인적으로 억울해도 선생님이 교육을 위해 취한 조치라면 참고 기다려줘야 한다.

    매일 아침 조회를 마치고 나온 담임선생님들이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더라는 관찰력이 이미 CCTV이고, 매일 저녁 종례를 하면서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파악하는 관찰력이 역시 CCTV이다. 학생들의 눈빛만 봐도 심리를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있는 분들도 선생님이다. 선생님들의 지혜와 노력이 아니고는 외국의 어떤 좋은 정책도 외부의 어떤 좋은 인적 자원도 학교 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없다.

 

    여시동 차장님의 칼럼이 의미 있는 것은 교육의 문제는 선생님들 손에 의해서만이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데 있다. 그동안 정치인이든 교육정책론가이든 학부모든 교육에 대한 이상을 한 번에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이상 실현에 선생님은 단순히 수단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교육 정책이라도 선생님의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며, 아무리 많은 돈을 쏟아 부어도 선생님들이 가치 있다고 판단하지 않으면 그 사업은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제 다시는 학교 폭력의 희생양이 없어야 한다. 이 칼럼을 계기로 언론 전반에 필력이 모아져 더 이상 선생님들의 손발을 묶는 나쁜 정책들을 폐하도록 촛불을 들어야 한다. 이번 스승의 날에는 여느 해처럼 선생님들의 촌지 운운하면서 교권을 실추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학교에서 안 좋았던 기억들을 접어 새 희망의 펜을 들어야 한다. 이 번 스승의 날을 계기로 백년지계를 내다보는 스승 존경 문화의 붐이 일기를 바란다.

 

글 신호현 

 

칼럼참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5/12/2013051201661.html

그림출처 : http://blog.naver.com/qkrwoduda?Redirect=Log&logNo=60166058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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