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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소설 비평문 읽기-중1 교과서의 지문(천재교육)

원 시 인 2016. 5. 11. 10:36

[시비평문]

 

우리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 강영준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백석, ‘수라(修羅)’

 

   우리는 일상에서 숱하게 접하는 벌레와 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그저 징그럽고 지저분한 하찮은 존재로 여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말하는 이의 태도는 다르다. 그는 무심코 문밖으로 쓸어 버린 새끼 거미 한 마리를 잊지 못한다. 거미를 쓸어 내고 보니 연약한 새끼 거미가 살아가야 할 방 밖은 이미 차디찬 밤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은 새끼 거미가 쓸려 간 곳에 큰 거미가 나타나면서 더욱 복잡해진다. 말하는 이는 가슴이 짜릿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짜릿하다는 말은 온몸에 전기라도 통한 듯이 큰 충격에 빠진 것을 의미한다. 말하는 이는 어째서 이런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사람들은 어려움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보면 동정심을 느낀다. 이런 감정은 우리가 그와 유사한 고통이나 슬픔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때 더욱 심화된다. 결국 말하는 이가 어미 거미가 나타났을 때 예민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말하는 이가 거미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거미가 처한 환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별이다. 거미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새끼 거미는 누군가에 의해 차디찬 밖으로 쫓겨났고, ‘어미 거미는 새끼를 찾기 위해 방 안을 떠돌고 있다.

   이 작품의 시인인 백석은 가족 공동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창작했다. 가족을 잃고 홀로 외로이 살았던 그에게 가족은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말하는 이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말하는 이가 거미들을 보고 가슴이 짜릿하고 서러웠던 이유는 그 자신이 가족과 가슴 아프게 이별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3연에서 말하는 이는 다시 또 다른 한 마리의 거미를 본다. 그 거미는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이다. 말하는 이는 어미를 찾는 새끼 거미를 돕고 싶어 한다. 하지만 새끼 거미는 말하는 이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말하는 이는 더욱 서러워진다. 마치 자신이 거미 가족을 흩어지게 한 장본인과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미의 처지와 자신의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작고 연약한 존재는 거미가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식민지 시절, 가족과 헤어져 고국을 떠나 만주 벌판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자기 자신의 처지를, 또 우리 민족의 처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쯤에서 이 시의 제목을 한번 살펴보자. 수라(修羅). ‘아수라(阿修羅)’의 줄임말로서 불교에서 싸움을 일삼는 나쁜 귀신을 뜻하는 말이다. 시인이 제목을 수라라고 지은 것은 가족을 흩어지게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이라고 말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마지막에서 말하는 이는 새끼 거미 한 마리를 문밖으로 버린다. 그리고 새끼 거미가 엄마와 누나나 형을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 이는 거미 가족이 재회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에는 거미 가족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깨어져 버린 식민지 조선의 가족 공동체가 다시 회복되기를 바라는 시인의 소망도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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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비평문]

흥부전을 읽는 눈 | 정출헌

 

   흥부와 놀부,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욕심 많은 형은 망하고 마음씨 착한 동생은 부자가 되었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하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그 뻔한 흥부전의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큰 문제다. 한번 물어보자. 흥부가 부자가 된 이유가 무엇이냐고. 모두들 착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물어보자. 흥부가 보여 준 착한 일이 뭐냐고. 모두들 제비 다리를 고쳐 준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정답이다.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 준 일, 그건 착한 일이고 그것 때문에 복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게 흥부를 그토록 벼락부자로 만들어 줄 만큼 대단히 착한 일이었던가? 그 정도는 아니다. 예를 들어 기르던 강아지가 문틈에 발이 껴서 다쳤다면, 누구라도 동물 병원에 데려가 치료를 해 줄 것이다. 그렇다면 흥부는 사소한 일을 하고 분에 넘치는 복을 받은 게 아닌가? 하지만 어느 누구도 흥부전의 결말이 형평성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 복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왜일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먼저 흥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하긴 요즘 사람들은 흥부를 긍정적으로 보는 것조차 주저한다. 형에게 의지해 살았던 것, 가족을 굶주리게 했던 것을 들어 그의 의타적인 성격과 무능함을 꾸짖기까지 한다. 놀부를 근면하고 부지런하다며 본받아야 할 인물로 추켜세우는 대신 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흥부는 왜 형의 집에서 살고 있었을까? 맏아들이었던 놀부는 부모 재산을 몽땅 물려받는 대신 아우인 흥부를 거둬 주기로 했다. 한정된 재산을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장자(長子)에게 재산을 몰아주고 장자는 아우를 건사해야 했던 조선 후기의 상속 제도를 배경에 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재물 앞에서 한없이 탐욕스러워지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놀부는 흥부가 점점 귀찮아졌다. 예전의 약속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주지 않은 채 흥부 가족을 쫓아냈다.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닥친 날벼락 앞에서 흥부는 막막했다. 달리 변통할 방법이 없었던 흥부는 부인의 권유로 형을 찾아간다. 믿을 곳이라고는 천지 사방 형밖에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매만 실컷 맞고 돌아온다. 그때 흥부와 그의 아내는 깨닫는다. 자신을 도울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날부터 흥부 부부는 돈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했다. 그래도 헐벗고 굶주렸다. 게으르거나 무능력해서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천지에 날품팔이로 부자 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흥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돈벌이는 매품이다. 자기 신체를 팔아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리려 애썼던 흥부.

   인간이 이쯤 이르면, 다른 사람의 처지를 돌아볼 여유란 없다. 십중팔구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흥부는 그렇지 않았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아 봄 햇볕을 쬐고 있다가 우연히 목격한 광경. 새끼 제비가 날기 연습을 하다 다리가 부러져 파르르 떨고 있었던 것이다. ‘새 다리란 말이 본디 가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새끼 새의 다리는 오죽이나 가늘었을까? 눈에 잘 띄지도 않았을 텐데, 가늘게 떨고 있는 것까지 보았다니! 흥부의 눈은 참으로 예사롭지 않다. 아니, 정말 예사롭지 않은 것은 새끼 제비가 불쌍하여 부러진 다리를 실로 찬찬 동여매어 주던 흥부의 마음이다. 자기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을 판인데, 미물의 고통에도 이렇듯 아파했으니. 흥부는 그래서 착한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흥부전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미물의 고통에도 가슴 아파할 수 있다면, 고통받는 인간에 대해서야 말할 필요도 없을 거라는 믿음. 맹자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을 행하는 실마리다.[惻隱之心(측은지심), 仁之端也(인지단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는, 피눈물 나게 고생하면서도 착한 심성을 잃지 않았던 흥부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흥부를 착하다는 말 한마디로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러면 뭐라고 부를까? 아름다운, 그래 흥부를 아름다운 사람이라 부르기로 하자. ‘아름다운 사람, 흥부!’ 이런 흥부를 어찌하겠는가? 애써 외면하겠는가? 그리해서는 안 된다.

 

 

어휘 풀이

권선징악 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

의타적 남에게 의지하는.

건사하다 몸이나 물건을 잘 보살피고 돌보다.

엄동설한 눈 내리는 깊은 겨울의 심한 추위.

매품 예전에, 관가에 가서 삯을 받고 남의 매를 대신 맞아 주는 데 들이던 품.

미물 인간에 비하여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동물을 이르는 말.

경외심 위대하거나 신비한 대상을 우러러보고 두려워하는 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