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왕권조례
예전에는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요즘에는 선생님을 하녀나 하인쯤으로 생각하는 일부 몰상식한 사람들이 있다. 자기 수준에서 학교와 선생님을 판단해서 억지주장을 펴거나 무리한 민원을 한다. 예전에도 이런 몰지각한 학생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교권이 학생 인권을 눌러 교육이 유지되었다. 교실에서 벌을 세우거나 회초리를 들어 혼내줬다. 담임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학생부에 데려가 무진장 혼을 내어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학생주임 선생님들을 '공포의 학주'라며 피해다녔고 어쩌다 만나면 혹시 뭐라도 걸릴 것이 없을까 멀리서부터 인사를 했다. 선량한 학생들을 괴롭히는 불량학생들이나 심지어 학교 밖에서 폭력, 절도 등 범죄를 저질러도 학생주임이 경찰서에 찾아가 '이 학생들을 책임지도하겠다.'고 하면 풀어주던 전설 같은 시절도 있었다. 학생들이 가출해서 못된 곳에 가 있으면 학부모보다 선생님들 먼저 달려가 학생들을 구해오곤 했다. 그 때 학부모님들은 지금도 만나면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내 학생들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신념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학교 현장이 비뚤어져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현장의 지나친 폭력을 과장하여 선생님들을 매도하는 영화가 나오고 학생 인권이 부각되면서 선생님들의 훈육은 폭력이 되었다. 학생주임 선생님들을 폭력교사로 경찰에 신고하고, 선생님들의 거친 언어도 언어 폭력이라 하여 학생들이 고소고발하게 된 이후부터였다. 교육청을 중심으로 '학생인권조례' 시행령이 내려지자 불량 학생들을 때려서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명퇴를 내고 학교를 떠났다.
학생 간의 문제가 터지면, 학교 경찰이 배정되어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미국처럼 경찰이 학교에 상주하면서 학생 문제 사안을 가까이서 해결해주면 좋으련만 학교 담당경찰에게 학교사안을 의논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선생님들은 불량학생들을 더 이상 지도하지 못하게 하고 선생님들 손발만 묶었다. 학생인권조례 이후 학교는 학생들 간에 학교폭력이 난무했다. 혼내는 선생님이 없으니 불량학생들은 제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간에는 선배가 쳐다만 봐도 '째려봤다'고 신고하고 심지어는 후배가 선배들을 마구 때려도, 학생이 선생님을 때려도 마땅히 처벌하기 힘들게 되었다. 학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전학도 마음대로 보낼 수 없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이나 당하는 학생이나 선생님들이 혼내주고 보호해주는 시대는 갔다. 선생님이 이렇게 하면 '왜 이렇게 하느냐!' 따지고, 저렇게 하면 '왜 저렇게 하느냐!' 따지니 학생 사안이 터지면 선생님들은 수업이고 학교 업무고 진행할 수 없어 거의 멘붕 상태에 빠진다. 담임은 물론 학생부장 선생님은 그 문제를 주관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채 학부모님들에게 끌려 정신병을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육청에서 학생 사안을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역시 학교 밖에 있으니 공언이 되었다.
가정교육이 안 된 학생일수록 그 뒷 배경에는 안하무인 학부모가 있기 마련이다. '당신은 교사 자격 없다!'고 소리친다. 교사 자격을 국가에서 주는데 마치 자기가 준 것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학교에만 오면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는지 목소리가 커진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죄인인 양 머리를 숙인다. '오늘도 무사히'를 기도하지만 2-30명의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담임수당 13만원 받는 담임들은 매일 살얼음판을 걷는다.
필자는 시골에서 자라 시골길 어둠 속 개구리 울음소리 들으며 선생님의 꿈을 키웠다. 학교 선생님들만큼 존경 받는 직업이 없다고 생각했다. 스승의 날에 꽃과 작은 선물들이 책상 위에 가득했다. 학부모 총회를 하면 학부모님들 머리 조아리며 '우리 아이 많이 혼내주세요.'를 당연스럽게 부탁했다. 잘못하는 행동을 혼내서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스승의 날엔 학부모들이 회초리를 전해주면서 아이들 혼내면서 가르치라 했다. 학생 사안이 터져 학부모를 부르면 내 자식의 잘못이 가정에서 잘못 가르친 학부모의 잘못인 양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반복했다.
돈 있는 학부모들이 가끔 '그동안 선생님들께서 아이들 가르치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식사를 제공해주면 선생님들은 '그런 곳에 안 간다'면서도 내심 뿌듯한 표정이었다. 학생들이 선생님들 속썩여도 학부모님들의 응원이 있어 힘든 줄 모르고 생활했다. 지금 30여년이 지났어도 그 때 학부모님들은 연락이 되고 그 때 아이들은 저마다의 직업을 찾아 연락되는 학생들이 수백 명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졸업하면 연락을 끊고 소식도 정도 끊고 산다.
이제 얼마 있으면 퇴직하겠지만 요즘 젊은 선생님들이 안쓰러워 가슴이 미어진다. 담임을 맡으면 학생들은 예쁜데 그 뒤에 학부모님들이 무섭단다. 지난 3월 학부모 학교 설명회에서 '예전에 학부모님들은 우리 편이었는데 지금 담임을 맡으면 학부모님들이 제일 무섭다.'고 하니 학부모님들께서 선생님들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을 당부했다. 그리 무섭다는 중2학생들을 지도하는 선생님들, 아직 개념 정립이 안된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슬픈 현실인데 이렇게 큰 슬픔이 터졌다.
초중고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으면 교사가 1순위를 달리는데 정작 그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은 있는가. 그 아이들이 선생님을 하는 시절에는 학부모 민원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선생님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선생님이 강력히 제제를 할 수 있는 시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독일의 교사가 경쟁상대'라는 공익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다. 독일에 갔는데 학생들이 선생님 말을 잘 따르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우리의 교육이 독일의 경쟁상대가 될 수 있을까.
사회에서는 19세 미만을 미성년자라 한다. 피터스(영국의 교육철학가)는 '교육은 미성숙한 개인을 인간다운 삶의 형식으로 입문시키는 과정'이라고 했다. 미성숙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어찌 학생 인권만 키워왔던가 법적으로 14세 미만은 촉법 소년이라고 처벌도 하지 않는가. 그러니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을 때려도 선생님들은 대처할 방법이 없다. 그런 아이들 30여명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하루 종일 공부를 가르치려면 공부하기 싫고 장난치기 좋아하는 아이들, 친구 괴롭히는 것을 즐기는 아이들, 자해하는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치란 말인가.
교육은 학부모들이 선생님 편이 되어 주어야 가능하다. 내 자식이 귀하면 선생님들께 겸손하게 더 많이 배우도록 자식들을 다독여야 한다. 한 발짝만 더 내밀면 모두가 대한민국 우리의 아이들인데 내 아이 네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가르치는 선생님도 우리의 미래를 짊어진 우리의 자녀들 아닌가. 학생인권조례 이후 학교에서 학생들은 그 지위가 커지더니 선생님의 지위를 넘어가고 있다. 학생들이 왕 되고 선생님들이 시종이 되는 법이니 학생왕권조례라 아니할 수 없다. 문제는 학생왕권조례보다 선생님들을 더 괴롭히는 아동학대법, '칭찬하면 차별, 훈육하면 학대'라는 괴물 같은 법이 달려들고 있으니 선생님들은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신호현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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