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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신학봉(申學奉 1901년생)

원 시 인 2019. 8. 25. 07:11

[평산 신씨 독립운동가] 신청서 보기   [기고글]독립운동가 가족찾기 대한독립군비단 일등병

 

신학봉(申學奉 1901년생)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9014

 

1901년 - 충북 충주시 앙성면 용포리 88번지에서 출생

1919년 - 만주, 북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심(19세~?)

 

독립운동 활동 이력

 

 1. 3·1운동의 봉화(烽火)식에 참여하심

 

    1919년 3월 13일 만주에서의 3·1독립운동의 첫 봉화는 북간도 용정촌에서 올려졌다. 이날 용정의 날씨는 모진 바람이 불고 티끌과 모래를 날리는 거치른 날씨였다. 3·1운동 축하식장인 서전(瑞甸)평야1)에는 용정 시가에 있는 명동 학교를 필두로 70~80리 거리로부터 2백 80리 거리에 있는 12개의 한국인 학교 직원과 학생들은 물론, 일제가 관리하는 학교의 학생까지 온갖 장해를 물리치고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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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전평야(瑞甸平野) ; 이곳은 중앙학교 뒤뜰 울타리를 경계로 하여 일본영사관 치외법권 지역 밖으로 되어 있었다.(698쪽)



    명동학교 및 정동(正東)학교 학생들로 조직된 충렬대원(忠烈隊員) 3백 20명 중 과반수는 권총까지 휴대하고 비장한 각오로 나섰다.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 오자 용정 시내의 우리 동포들은 이미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모여들었다. 이날 집합한 군중의 수는 각 기록이 분분하나 모든 문헌과 체험자들의 견문담을 참작해서 9천 명쯤 된 것으로 믿어진다.2)
    식은 천주교 성당 종소리가 끝나자 시작하기로 되었으므로 초만원을 이룬 동포들은 흥분과 초조 속에서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장에는 대회장(大會長)인 김영학(金永學), 회장 구춘선(具春先), 부회장 배형식(裵亨湜) 목사를 비롯하여 김내범(金迺範)·정재면(鄭載冕)·신학봉(申學奉)·강백규(姜伯奎)·마진(馬晋) 등이 참석하였다.

 

    시간이 되자 축하식은 대회장 김영학(金永學)의 독립선언 포고문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독립선언 포고문]
우리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 민족의 자유, 민족의 정의,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4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요, 2천만 신성한 민족이었노라. 그런데 우리 역사를 시멸(澌滅)하고 우리 민족을 타파하여 기반(羈絆) 밑에 신음케 하며 농락 중에 고통케 함이 어언 16개 성상을 열력(閱歷)하였다. 이는 강린(强隣)의 무정이라 할 수도 없고 학정(虐政)이라 할 수도 없으며, 침략주의적 묵은 옛 시대의 사용방법이었고, 위미(萎靡)적 소약 인생의 화원(禍源)이라 누구를 원망하며 누구를 허물하리오. 그러나 지사의 눈물은 동해에 보태었고, 우민(愚民)의 원한은 창천에 사무쳤다. 천청(天聽)은 민청(民聽)으로, 천시(天視)는 민시(民視)로 세운이 일변하고 인도가 새로워지는(중략)

 

 

 2. 대한국민회 지도자로 참여하심 

 

 대한독립군과 봉오동(鳳梧洞) 전투
 


    제1절 대한국민회와 독립군 편성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됨과 함께 만주방면 우리동포사회에서도 3월 13일 북간 도 용정촌(龍井村)에서의 만세 함성을 위시하여 각지에서 독립 선언 축하식과 시위행진이 전개되었으며, 뒤이어 독립투쟁을 위한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북간도지방과 혼춘(琿春)에서도 황병길(黃丙吉)·박치환(朴致煥) 등의 주모로 건국회(建國會)가 조직되어 무기 3백 정 구입 계획이 추진되고, 화룡현(和龍縣) 태랍자(太拉子)에서는 명동(明東)·정동(正東) 학교의 직원·생도들을 중심으로한 충렬대(忠烈隊)가 조직되어 13일 용정촌 시위에 참가하였다.    또 연길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에는 최경호(崔經浩)를 단장으로 하는 1천여 명의 자위단(自衛團)과 김영학(金永學)을 회장으로 하는 조선국민의사회(議事會)가 있고, 또 대한독립기성총회의 본부가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헌법이 공포됨에 따라 연길(延吉)·왕청(汪淸)·화룡(和龍) 3현의 대표자들은 회의를 열고 간도 대한국민회로 통합,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이보다 앞서 조직되었던 혼춘현(琿春縣)의 대한국민회(회장 이명순[李明淳])도 합하여 북간도지방의 큰 조직체를 이루였다. 회의 조직은 본부와 지방 총회 및 지회로 되어 있었는데 1920년 1월 말 현재의 조직 상황을 보면 아래와 같다.
본부 소재지 연길현 춘양향(春陽鄕) 합막당(蛤蟆塘)
임원 회장 구춘선(具春先)
  서기 김정(金精)·고동환(高東煥)
  재무 김규찬(金圭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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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호부장 박두화(朴斗和)                                 편집부장 이완(李完)
      통신부장 최윤주(崔允周)                                      중앙총회 소재지 연길현 지인향(志仁鄕) 국자가  회장 강구만(姜九萬)
      동부지방총회 소재지 연길현 지인향 화령촌(花嶺村)  회장 양도헌(梁道憲)
      서부지방총회 소재지 연길현 숭례향(崇澧鄕) 묘구(廟溝)
      남부지방총회 소재지 화룡현(和龍縣) 지신사(智新社) 장재촌(長財村)  회장 마진(馬晋)
      북부지방총회 소재지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 합수평(合水坪)
   그리고 대한국민회는 80여 개소의 지회를 통하여 민정 즉 거주 동포들의 자치 생활에 치중하지만,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여 독립군 부대를 편성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에도 국민회의 지도자 김영학(金永學)·김약연(金躍淵)·김내범(金迺範)·구춘선·마진·유찬희(柳瓚熙)·강백규(姜百奎)·신학봉(申學奉)·정재면(鄭載冕) 등 인사들은 현지의 중국 관공서 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친화에 노력하였기 때문에 중국 관민들의 깊은 이해와 협조를 얻어, 당시 중·일 간에 말썽이 되던 우리의 무기 반입·독립군 훈련 등의 일을 무난히 할 수 있었다. 또 국민회는 안무(安武)의 지도·훈련으로 약 3백 명의 소속 무장군을 편성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1)
   그런데 이 무렵은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연합군이 각기 철수할 때인데, 마침 노령 연해주(沿海州) 방면에 출전하였던 체코 군대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무기를 팔아버린 다는 소식이 전하여지게 되었다. 여기서 국민회 기타 단체에서는 모두 군자금을 급히 모으고 무기 구입 책임자들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으로 보내어 그곳 동포 지도자들의 주선으로 무기를 구입하게 되었다. 당시 장총 1정의 구입 가격은 10원 내지 20원이었는데 국민회에서 회원 및 실업가들에게 모은 성금이 5만 원이나 되었던 것이니 1개 연대 소요의 총기를 구입할 수도 있는 실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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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국동지원호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동만주의 운동 중 1장 1절 동간도 국민회 조, 국사편찬위원회 엮은 ≪한국독립운동사≫ 3권 제3편 1장 2절 항일 단체와 독립군의 편성, 홍상표(洪相杓) 지은 ≪간도독립운동소사≫ 8 독립 운동 단체들과 무장 독립군 편성, 1919년 4월25일자 일제 비밀문서 소밀(騷蜜) 제968호 ‘재외 선인의 독립 운동 개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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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실은 무기를 사는 일보다도 들여오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이었다. 당시 무기 반입로는 대개 세 길이 있었다. 첫째는 우수리 강을 끼고 들여오는 코오스로 러시아의 니콜리스크를 경유하거나 스파스카야 또는 유정구(柳亭口)를 거치는 것으로 푸크라 니치나야 부근에서 국경을 넘어 둔전영(屯田營) 통로 또는 삼차구(三岔口)와 대오사구(大烏蛇遘)를 거쳐 왕청현(汪淸縣)의 오지 나자구(羅子溝) 지방으로 나오는 것이요, 둘째는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니콜리스크 및 추풍(秋楓) 지구에서 왕청현 오지로 들어 오는 것인데 동녕현(東寧縣)에서 중·소 국경을 넘어 대오사구·나자구(羅子溝) 등을 경유하여 혼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 또는 왕청현의 춘명향(春明鄕) 서대파(西大坡) 방면으로 나오는 것이요, 세째는 남부 연해주 지방에서 혼춘현 국경 지방으로 반입하는 것으로 홍기하(紅旗河) 상류 삼림 지대를 지나 바라바시 방면에서 국경의 감시를 벗어나 혼춘현의 산간 지대로 나오는 것이다.
    이야말로 산간 험로의 강행군이었던 것인데 신체 건강한 농촌 청년들을 무기 운반대로 동원하여, 한 사람이 총 2, 3 자루씩을 등에 메고, 그것도 중국 관헌이 없는 곳을 찾아 대개는 야간 운반을 하였던 것이니, 싸우는 군사들만이 아니라 일반 동포들의 무기를 들여오기까지의 그 성의, 그 노력도 두고 두고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일이였다.2)
    한편 대한국민회 및 국민회 무장군과 항상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공동의 목표를 향하여 전투 활동을 벌이던 무장 독립군으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崔振東 일명 : 명록[明祿])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있었다.

 

  3. 대한독립군비단 일등병으로 투쟁하심 

 

http://www.google.co.kr/url?sa=t&rct=j&q=&esrc=s&source=web&cd=15&ved=2ahUKEwjg9Jnz05_kAhW3y4sBHZ63AXMQFjAOegQIBhAC&url=http%3A%2F%2Fi1.daumcdn.net%2Fsvc%2Fattach%2FU03%2Fblogbook%2F538911AB04058B0002&usg=AOvVaw0QsWGuOLA28khcf6MJxhlG

 

  4. 독립군부대에 무기와 군자금을 지원하심 

 

 

 

  5.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심 

 

 

 

  6. 명월구 기독교회를 창립하심 

 

 

 

 

 

 

 

신학봉(申學奉)에 대한 제적증명서

 

  1) 제적증명의 보관 상태

     가. 충북 충주시 앙성면 용포리 88번지의 본적으로 존재

        - 담당 면사무소 직원(신 * *)에 의하면 1950년 전쟁 당시 면사무소 화재로 모든 자료 소실

        - 1950년 당시 돌아가신 분은 '亡'자를 표기하고 복원하지 않았으며, 생존자만 복원

        - 그 이전 자료는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알 수 없음

     나. 경기 이천군 호법면 주백리 73번지의 본적으로 존재

        -

 

 

 * 앙성면사무소 직원(신 * *)의 증언

  - 1950년 6.25때 면사무소 화재로 이전 기록이 소실되었음

  - 당시 돌아가신 분들은 '亡'자를 붙이고 살아있는 사람 중심으로 복원하였음. 

 

1) 신학봉(申學奉, 4234(1901)년 11월 22일생)

  - 충북 충주시 용포리 12번지 출생.[출생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움]

  - 아버지 신덕원(亡申德元)이 돌아가셔서 자료가 없음
  - 1971년 11월 17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주박리 73에서 돌아가심

 

2) 이순성(李순成) 4244(1911)년 12월 6일

  - 이필세(李弼世), 이명배(李明培)의 장녀['長'자를 지움]

  - 충북 충주시 용포리 12번지 출생. 이필세의 장녀[장녀 아니라 차녀임]

  - 4260(1927)년11월 20일 신학봉[당시 27세]과 혼인(婚姻)[당시 16세임] 

 

 

 

신학봉(申學奉 1901년생)에 대한 증언

 

 1) 안 * 원 할머니(고담동에 거주하셨으나 2015년 10월 1일 소천하심)
      "머리를 짧게 깎으셨고 인품이 좋았고, 손재주가 좋고 일처리가 꼼꼼하셨다. 독립운동을 하셨다고 들었으며 술을 많이 좋아하셨다."

      참조 : http://blog.daum.net/phshh/15783053

 

 2) 신 * 균 작은아버지
      어렸을 때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만주에서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때는 아무 의미 없이 들었다. 작은 아버지의 허풍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단월초등학교 다니던 어릴 시절에 할아버지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학생들 앞에서 발표하면서 가슴이 울컥했던 추억은 있다.

 

3) 김 * 희 당숙 아줌마
      시집와서 시아버지 형제들(신학봉의 처남들)에게 들었는데 "할아버지가 일본에 끌려가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고 돌아 왔다."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끌려갔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그 후에 할머니랑 결혼(1927년)하고는 목수 일을 하셨단다." 우리 가족이 주박리에서 고담리로 이사하여 10여년 간 살았던 집이 할아버지가 지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 집이 존재하고 있다.

 

4) 신 * 균 조카딸(천호동 거주)
    어려서 작은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시다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음. 물증이 없어서 안타깝다.

 

   왜 우리가 자손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가. 결국 우리의 삶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관심이 없고 자손들이 기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제자들을 사랑으로 가르쳐야 하는가. 삶의 순간에 스승을 기억할 추억의 조각들을 그 품에 품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제 부모를 욕되게 할 자손도 있으며 제 스승을 욕할 제자도 있다. 우리가 부모로서, 선생으로서 부지런하고 삼가야 할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