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매일] 평산신씨 독립운동가 신학봉(申學奉,1901년생)
독립운동가 가족 찾기
올해는 3.1절 100주년과 광복 74주년 기념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조명으로 100여 년 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논쟁이 더욱 뜨거운 한해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 작은아버지로부터 "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던 분이시다."는 말을 얼핏 듣고 할아버지에 대해 발표하는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작은아버지의 말씀을 듣던 대로 발표하던 어린 가슴에 처음으로 '뜨거운 울분'같은 것이 솟구쳤던 기억이 난다.
1901년생 신학봉(申學奉) 할아버지는 필자가 일곱 살이던 1971년에 돌아가셨다. 주로 한복을 입으셨고 단아한 인품이셨지만 술을 좋아하셨다. 어머니는 할아버지를 위해 집에 막걸리를 몰래 담그셨지만 할아버지는 당신 손으로 퍼드신 적 없이 손주들에게 퍼달라 하시고 당시 돈으로 50원이나 100원(당시에는 큰 돈)을 주셨던 기억이다. 할머니와 결혼 후 목수 일을 하시며 집을 지으셨는데 꼼꼼하시고 완벽한 일처리가 주변을 감동하게 하셨는데 그런 할아버지가 왜 술을 좋아하셨는지도 몰랐다. 그저 서서히 해가 서산에 지듯 그렇게 잊혀지시던 인물이었다.
할아버지 세대가 서산에 지고, 아버지 작은아버지 세대가 서산에 지고, 이제는 동네 아저씨 형님 세대도 어둠 속에 휘말릴 즈음이다. 3.1운동 100주년의 깃발이 펄럭이는 사이에 만세소리의 외침처럼 "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던 분이시다."는 말이 다시 가슴에서 울컥울컥 샘물을 퍼올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100년 전에 할아버지가 정말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았단 말인가.' 만세소리의 파도처럼 궁금증이 마구 솟구치기 시작했다.
국가보훈처 홈페이지에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찾습니다' 코너를 통해 할아버지의 이름을 검색해 보니 만주 훈춘, 용정 지역에서 활동하신 이력들이 많이 있었다. 1919년 3월 북간도 용정 일대에서 3.1운동 봉화식에 참여하셨으며, 대한국민회에 지도자로 참여하신 자료가 있다. 대한독립군비단 일등병(당시 19살)으로 봉오동 전투에도 참여하셨으며, 독립군 부대에 무기와 군자금을 지원하시기도 하셨다. 명월구 기독교회를 창립하시는데 조력하시고, 독립운동가 김약연 목사님과 같이 활동한 이력들도 메아리처럼 떠돌고 있었다.
아! 가슴이 뜨거웠다. 제적증명서를 떼어보니 그전 이력을 찾을 수 없었다. 고향이셨던 충주 앙성면사무소에 문의하니 1950년 6.25 당시 화재로 모든 서류가 소실하여 돌아가신 분은 '亡' 자를 쓰고 살아계신 분들만 기록했다고 한다. 족보를 찾아보니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지난 100년을 돌아보니 일제와 전쟁으로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것이 없는 현실이다. 친척 증언을 통해 '할어버지는 일제에 끌려가서 고문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들었다 한다. 100년 전 만주의 독립운동 사실을 현재의 살아계신 분들의 증언만으로 인정이 가능할까.
국가보훈처에 전화하니 '빨리 신청서를 제출하세요.'라는 말에 희망을 걸고 각종 서류를 떼어 신청서를 송부했다. 요즘 신청자가 많아 내년 3.1절이나 8.15 즈음에나 연락이 올 거란다. 그동안 할아버지 고향에 가서 구십 어르신을 찾아 역사를 탐문하고 도서관에 가서 더 자료를 찾아볼 것이다. 문득 '쿤타킨테'라는 흑인 노예의 6대에 걸친 역사를 찾아 소설로 썼던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2대의 100년 전 역사추적도 이처럼 오리무중인데 참으로 대단하다.
요즘 영화로 재조명된 '봉오동 전투' 이후 일제의 고문에 좌절된 독립의 의지, 답답하고 암울했던 만주의 하늘에 어둠이 덮인다. 1927년 고향에 내려와 할머니와 결혼한 할아버지는 일제의 그늘에서 울컥울컥 솟는 뜨거운 가슴을 찬술로 식히지 않으셨을까. 오늘은 영화 '봉오동 전투'를 보러 가야겠다.(신호현詩人)
울산매일 보기 http://www.iusm.co.kr/news/articleView.html?idxno=855189
기골이 장대하고 통뼈이시라 힘이 세셨다는 할아버지 사진이 딱 2장이다. 7살 때 술 드시고 객사하셨던 할아버지가 어렸을 때 이해되지 않아 부끄럽게 생각했는데 손재주가 좋아 집도 지으시고, 짚으로 바구니, 멍석, 삼태기 등을 뚝딱 엮어내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틈만 나시면 술을 드시고 취한 세상을 사셨는데 작은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를 "네 할아버지는 일제 때 만주에 가셔서 독립운동을 하시며 일본 순사들을 때려잡으신 분이여."라고 하셨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늘상 술을 드시니 몰래 부엌 나뭇간 아래 항아리를 묻고 막걸리를 담그셨다. 면직원이 나와 커다란 꼬챙이로 나뭇간을 찌르며 술독을 찾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 들키면 어쩌나 걱정했던 기억도 있다. 할아버지는 부엌 나뭇간에 술독이 있는 줄 아시면서도 당신 손으로 떠서 드시는 법이 없었다. 7살 손주인 나에게 50환(당시는 큰 용돈)을 주시며 떠달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담근 술을 할아저지께 떠드리면 용돈을 받았던 것이다.
큰 고모 할머님은 할아버지가 만주에 갔다 오셔서 울분에 차서 다시 가시려는 것 "가면 죽는 데를 왜 가느냐!"며 말리느라 애쓰셨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좌절된 슬픔이 울분으로 남아 맨정신으로 살 수 없었던 모양이셨는데 7살 때로 다시 돌아가면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왜 그렇게 술을 드셔요?"라고 어린왕자처럼 물어 보고 싶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잊으려고 술을 먹는단다." 그러시겠지. "무얼 잊으려구요?"라고 채차 물으면 "살아 술이나 목고 있는 부끄런 내 모습을 잊으려 한단다." 그렇게 대답하실 것만 같았다.
지금 나는 그렇게 부끄러워 술을 마시던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싶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돌아가시는 것도 뜻깊은 일이지만 살아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저를 낳게 되신 것도 뜻깊은 일이니 힘내세요!'라고. 할아버지는 7살 나의 어린 추억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할아버지의 그 정신이 살아 손주들에게 반공의 피가 흐르고, 통일 운동의 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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