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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칼럼]삶의 발자국이 된 그리움의 시편-엄옥순 시집 '그늘미 마을'

원 시 인 2022. 7. 1. 06:28

[독서칼럼] 에듀프레스에서 보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조영희)  절대고독을 극복한 시인(안서경)

 

삶의 발자국이 된 그리움의 시편

 

- 엄옥순 시집 '그늘미 마을'

 

 

 

   사랑이 머문 자리마다엔 그리움의 꽃이 핀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나이들수록 그리움에 묻혀 행복하다. 그리움이 바다라면 어떤 이에게는 평안을 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리움에 빠져 사무칠 것이다. 그리움이 산이라면 멀찍이 바라만 보아도 듬직하고 가까이 매일매일 조금씩 오르며 풀과 나무, 물소리 새소리 들으며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어렸을 적에 시골적 정서, 즉 그리움을 가슴에 품지 못했다면 감히 시인이라 말하지 마라.     

   어떤 '사건'이거나, '사람'이거나, '사물'일지라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시인의 숙명이다. 숙명이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처럼 타고나는 것이다. 누구나 시인은 '3사'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긍정과 연민의 마음으로 수없이 되새김해야 그리움이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마음의 고향으로의 끝없는 여행이 그리움이다.

   '그늘미 마을'은 어쩌면 시인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영원한 그리움의 공간일 것이다. 모든 마을들이 남쪽을 향하겠지만 살짝 동쪽으로 기울어져 아침에는 밝은 햇빛으로 반짝거리지만 점심이 지나고 오후가 되면 서쪽 그늘이 드리워져 살짝 어둡지만 그래서 더욱 편안하고 정감이 가는 마을. 동네 어귀에는 성황당이 있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넓은 평상 위에 앉아서 동에 노인들을 불러 모으는 마을이다. 어제와 오늘이 별반 다를 것이 없어 큰소리도 나지 않는 마을이다.

   그곳에서 한 소녀는 만나는 어른들(사람)에게 인사를 했을 것이고 가끔은 동네 어른들의 이야기(사건)를 들으며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동네에 자라는 풀과 나무들(사물)을 보며 그 예쁜 자태에 감동했을 것이다. 오빠나 언니들이 그냥 지나쳤을 샛노란 개나리를, 연붉은 진달래의 눈망울을, 노오란 민들레 발자국을, 작은 소리에도 놀라 날아오르는 참새를, 춤추듯 신나는 나비를 바라보느라 발걸음이 느려졌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마다 변화무쌍한 자연에 신났을 것이다.

   그런 소녀가 자라 선생님이 되어 바쁘게 서울에 살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면서 한동안 고향을 잊고 살았을 것이다. 어쩌다 연이가 보내온 쑥떡 한 상자를 열어 입에 당기니 울컥 그늘미 고향이 떠오른다. '한 개 또 한 개 연신 입에 당기니 / 불현듯 저문 빛 내리는 고향집 대청 둘러 앉아 / 쑥떡 나누던 흐뭇한 봄날이 / 곁으로 바짝 당겨 앉는다'('쑥떡을 먹으며' 부분, 13쪽) 쑥떡은 오물오물 씹히면서 연신 고향 소식을 들려준다. 하나둘 세상을 떠나셨다는 어른들 소식을 들려줬을 것이다. 아! 그랬지. 그 어른들의 소담스런 이야기는 잊혀진 줄 알았는데 불쑥불쑥 도시 속 고독한 손을 주머니에 넣을 때마다 잡혔을 것이다.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던 개나리, 진달래, 민들레가 그 자리에 피어 있어 다시 소녀가 된 듯한 착각 속에서 행복했을 것이다.

   '걸어온 생의 언덕과 골짜기를 이룬 / 촘촘한 지문 따라가면 / 그 고향에 이를까'('손(手)' 부분, 19쪽) 엄옥순 시인은 주머니 속에 잡힌 그리움을 꺼내 손바닥을 펴본다. 분명 무엇인가 잡혔는데 꺼내보면 없다. 손에는 힘겹게 바쁘게 살아온 흔적이라듯 손금만 보인다. 손금과 지문을 따라 '그늘미 마을'로 여행을 한다. '그 문 열고 다시 들어가면 / 둥근 저녁상 훈김 어리던 부엌 / 여남은 숟가락 뽀얀 사기 그릇 / 행여 살강에 얹혀 있을까'('그 집' 부분, 41쪽) 물론 현실에서 엄옥순 시인은 여남은 숟가락과 뽀얀 사기그릇이 살강에 얹혀 있지 않음을 인식하고 있다. 행복한 그리움 속에는 여전히 얹혀 있기에 현실과 그리움의 거리를 '이를까, 있을까' 물음표로 확인하고 있다.     

   '나 어릴 적 우리집 흰둥이는 문간지기였건만 / 아무나 보면 좋아라 꼬리부터 흔들어대는 통에 / 툭하면 동네 친구들 놀림감이었지'('유년의 뜰' 부분, 22쪽) '그늘미 마을'에는 여전히 '흰둥이'도 있고, 동백(20쪽), 채송화(21쪽), 냉이(24쪽)도 있다. 그 때 뛰어놀던 숲(26쪽)도 그대로 있다.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 쌍계사(30쪽), 길상사(31쪽)의 추억도 그대로 있다. 시인은 날씨가 추워져 '맑은 밤이면 / 나직이 내려서는 별들 / 이슬방울로 깃드는 / 그 마을 여전할까'('한로-그늘미 마을' 부분, 42쪽) 하고 그늘미 마을 을 떠올린다. 봄꽃이 피어도 그늘미 마을을 떠올리고 가을 서리가 내려도 그늘미 마을을 떠올린다. 

  엄 시인은 삶의 깊이가 익어가는지 가슴 아픈 사람들이 내 아픔으로 다가온다. '하룻밤 지새고 말지라도 / 헤어진 그대들 다시 돌아와 / 푸른 저 강가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려니'(한탄강-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보며' 부분, 64쪽) 멀리 형님 댁에 계신 어머니께 효도를 하겠다고 바닷가 횟집에서 맛난 회를 대접해 드리지만 세월의 한계 앞에 먹먹한 가슴만 쥐어짠다. '이승 너머 어딘가 / 머물 곳 바라보시는 듯 / 눈빛 하염 없어 / 혹여 그 눈빛에 걸쳐질까 / 딴청 부리듯 연신 미역국에 숟가락 들이밀지만' 

   엄 시인은 어릴 적 갈미초등학교(98쪽)도 떠올리고, 붉은 동백꽃 피어 있는 하동포구도 다녔다. 제주 대정마을 추사기념관에도 발자국을 찍고, 5월에 양양도 다녀왔다. 가는 곳마다 시인의 눈빛에 그늘미 마을의 그리움이 시의 발자국으로 꽃피었다. 어느 덧 엄 시인도 나이를 먹었는지 시인 옆에는 손녀 규원이(28쪽), 손녀 세윤이(34쪽), 손녀 예윤이(92쪽), 손녀 승윤이(62쪽)가 있다. 손자 손녀 돌봐주면서 시인이 손자손녀만했을 때 추억이 떠오른다. 그 때 '그늘미 마을'은 여전히 잘 있을까.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리움을 몇 번이고 주머니에 다시 넣고 시집 내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2016년에 '봄날에는 문득'(마을)이라는 시집을 읽지 않았는데 '그늘미 마을'을 읽으면서 겹쳐오는 시인에 대한 정감이 떠오른다. 먼저, 시인의 언어는 '그늘미 마을'에서 느낀 것 같이 '에/에서. 을/를' 등과 같이 조사를 생략하여 언어에서 옥구슬이 굴러가는 맑고 청량한 이미지가 흘러갔을 것이다. 다음, 시어가 주는 이미지가 봄날의 정서를 듬뿍 담고 있을 것이다. '그늘미 마을'을 읽는 내내 봄 여인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끝으로, '봄날에 문득'이란 시집에도 '그늘미 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듬뿍 담았을 것이다. '향수병'을 흔들면 고운 향내가 온 집안을 향기롭게 하지만 향수병에 젖으면 깊은 그리움이 온몸을 휘젓는다.(신호현 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