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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에서 시낭송 소식(조선일보)

원 시 인 2010. 8. 3. 08:00
국립묘지에서 시낭송 소식(조선일보)
 
                                                          공혜경 시낭송가 시낭송 보기
 
 

                   한국전쟁추념문화단지 조성 운동 ‘비목’ 작사 한명희씨

                  ‘피의 희생’ 영원히 기억하게 문화예술로 승화
 
 낭송회에 앞서 첫 번째로 무대에 등장한 연사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이용석 중령. 유해발굴사업단의 활동이 미디어를 통해 많이 알려진 상황이었지만 참석자 대부분은 이날 이용석 중령을 통해 유해발굴작업의 실물을 처음 보았다. 이용석 중령은 그간 유해발굴을 하면서 겪은 생생한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유해발굴에 관한 기록이 단 한 페이지도 없는 상태에서 2000년 4월 15일 경북 다부동 전투 현장에 갔다. 다부동 전투는 학도병들의 희생이 컸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땅을 파 들어가기 전에 먼저 움푹 파인 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나뭇가지와 검불을 쇠스랑으로 긁어냈다. 그러자 총탄 흔적이 있는 두개골들과 장화, 고교배지, 만년필 등이 쏟아져 나왔다. 6·25전사자들이 산하에 이렇게까지 내버려져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통곡했다.”

이 중령이 강원도 현리 전투 현장에서 발굴한 유해와 그 유가족에 얽힌 피눈물 나는 이야기를 할 때는 산새마저 울음을 멈춘 듯 사위가 숙연해졌다.

“그 전사자는 한 살짜리 딸을 두고 있는 상태에서 현리 전투에서 숨졌다. 수소문한 결과 딸과 부인의 이름을 알아냈다. 부인은 그후 개가해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상태였지만 우리는 그 부인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유해를 수습할 때 모녀는 50년 만에 처음 만났다. 딸은 어머니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해를 국립현충원에 안장하는 날 부인은 끝내 묘지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50살이 넘은 딸은 ‘유골함을 땅에 묻지 말라’며 유골함을 붙들고 오열을 했다. 이 딸이 아버지, 어머니 없이 살아야 했던 세월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라. 이런 비극이 두 사람만으로 끝이겠느냐? 유해를 발굴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도리를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유가족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 남아 있다면 그때까지 유해발굴을 계속하겠다.”

이날 낭송된 시는 ‘다부원(多富院)에서’(조지훈 시), ‘다시 6월에’(홍윤숙 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모윤숙 시), ‘국립묘지에서’(신호현 시) 4편이었다. 시낭송가 공혜경씨는 ‘국립묘지에서’를 원고도 보지 않고 낭송했다.

“…조국의 아들들아 딸들아/ 너희들은 아는가 듣는가 / 너희 자유 네 미래 지키기 위해/ 죽어서도 평화로운 세상 꿈꾸는 / 네 아비의 간절한 외침을.”

원로 성우 유강진씨가 ‘다부원에서’를 읽어내려 갔다.

“… 조그만 마을 하나를 / 자유의 국토 안에 살리기 위해서는 / 한해살이 푸나무도 온전히 / 제 목숨을 다 마치지 못했거니 / 사람들이 묻지를 말아라 / 이 황폐한 풍경이 / 무엇 때문의 희생인가를…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 안주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 성우 김세원씨가 '다시 6월에'를 낭송하고 있다.
‘김세원의 영화음악실’ ‘FM 가정음악실’ 등의 DJ로 유명한 성우 김세원씨는 홍윤숙의 시 ‘다시 6월에’를 낭송했다.

“…청솔처럼 푸르디 푸른 꿈, 희망, 사랑이며 청춘을 / 후회 없이 포탄에 날려버리며 / 사라져간 이 땅의 별들이여 / 그대들 흘린 피 값으로 살아남은 / 숱한 홀어미와 슬픈 아들 딸이 / 지난 세월 섬으로 쏟은 눈물, 가난, 외로움….”

김세원씨는 한 연이 끝날 때마다 원고를 한 장씩 무대 위에 휙 하고 던져버렸다. 원고가 허공에서 팔랑거리며 무대 위에 떨어지는 장면을 목도하면서 청중들은 산하에 흩뿌려져 묻힌 불망(不忘)의 이름에 가슴 저려했다.

기타리스트 김광석은 ‘단장의 미아리고개’ ‘굳세어라 금순아’ 등 전쟁가요를 연주했다. ‘격동 50년’ 해설자로 유명한 성우 김종성씨는 한명희 원장과 40년 지기(知己). 김씨는 월간조선 1987년 6월호에 한씨가 기고한 ‘이름 모를 비목이여’를 읽었다. ‘비목’의 노랫말은 한씨가 1960년대 초반 ROTC 육군 소위로 수색중대 DMZ의 초소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경험을 토대로 쓴 것이다.

“…내가 그곳 격전지에서 근무할 기회가 없었던들 나는 아직도 ‘총탄이 비오듯한다’라든가 ‘포탄에 벗겨진 대머리산’ 등의 표현은 소설 속의 이야기로만 치부하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그때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나는 이 같은 표현들이 진실에서 과히 멀지 않음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막사 주변의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양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이 톱날이 망가지면서 파편이 나왔다. 그런가 하면 순찰 삼아 돌아보는 계곡이며 능선에는 군데군데 썩은 화이버며 탄피 조각이며 녹슨 철모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연극배우 박정자씨는 모윤숙의 시를 읽었다. 배우 박정자씨는 “한명희 선생님이 육군 소위 출신이라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면서 “나도 대한민국 소위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사람”이라며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를 묵직한 중저음으로 낭송했다.

“…누런 유니포옴 햇빛에 반짝이는 어깨의 표지 / 그대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소위였구나 / 가슴에선 아직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 나는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이날 출연자들은 모두 출연료를 받지 않았다. 주최 측인 ‘비목마을 사람들’에서 교통편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거마비조로 최소한의 성의 표시도 없었다. 모두 승용차를 몰고 오거나 국철을 이용해 덕소까지 와 택시를 타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 집행위원장은 국철을 이용해 덕소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도곡리까지 온 경우였다. 참석자들은 행사가 끝난 뒤 석고정 뜨락에서 마을 사람들이 준비한 비빔밥과 수박을 먹은 게 전부였다. 그러나 호국영령께 드리는 헌다례(獻茶禮), 시 낭송, 기타 연주, 판소리, 색소폰 연주가 2시간에 걸쳐 다 끝났을 때 참석자들의 표정에서는 마음의 정화작용을 거쳐 6·25 전쟁이라는 비극이 예술로 승화되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6·25 기념행사가 다 끝나자 한명희 원장이 무대에 섰다. 한명희 원장은 “이제는 때가 된 것 같다”고 입을 뗐다. 한 원장은 “2004년에 30여명이 모여 6·25의 비극을 문화예술로 승화시키자는 뜻에서 추념문화단지를 조성하기로 결의했지만 좌파정권 시절에 전혀 먹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 원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우리는 죽은 이들, 채 피지 못하고 진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는 10대에 6·25를 겪었지만 지금 젊은이들은 역사관과 국가관이 희박해서 걱정이 많다. 원한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진혼 예술제를 열어주어야 한다. 우리 모두 철든 후손이 되어야 한다. 한국전쟁추념문화단지 조성이 시급하다. 여기 오신 분들이 새 역사를 일구는 터닝포인트에 있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이 운동에 불을 지펴달라. 나는 7월부터 ‘카페’를 만들어 모금을 전개해나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