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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시]두만강 푸른 꿈-문창학 선생(詩신호현)

원 시 인 2016. 5. 4. 20:11

[인물시 2016년 5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

 

두만강 푸른 꿈

 

                - 문창학 선생

 

 

두만강 푸른 물 노젓던 꿈

인재 양성 선생님이 될까나

멋진 제복 군인이 되어 볼까나

경술국치로 산산이 부서졌도다

 

스물아홉 청년 때 흘린 눈물

어둠 속 두만강 타고 흘렀구나

빼앗긴 조국 이룰 수 없는 꿈

오직 나라 위해 목숨 바치리라

 

사촌형 문창범 존경하며 따르니

죄없이 끌려와 피 흘리는 동포여

대한군정서 김학섭 동지와 의맺어

함북 신건원 주재소를 폭발했도다

 

아아! 뜨거운 피는 펄펄 끓어

만주에서 일경 습격 밀정 처단

세상에서 할 일은 산더미였는데

못다한 투쟁 검붉게 순국하노라

 

신 호 현

 

조선일보: http://forum.chosun.com/bbs.message.view.screen?bbs_id=1030&message_id=1240179

국가보훈처 자유: https://www.mpva.go.kr/open/open130_view.asp?id=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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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학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다시 태어난 독립군 文昌學, 1882년 ~ 1923. 12. 20., 함북 온성, 건국훈장 독립장 1968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고향 함북 온성에서 두만강을 보면서 밝은 미래를 꿈꾸던 문창학을 만나다

   문창학의 고향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접해 있는 국경 지역이다. 우리가 지금은 소위 ‘연변조선족자치주()’라고 부르는 중국 길림성()일대와 혼춘시(), 도문시() 지역과 마주 대하고 있는 곳이 바로 함경북도 온성군이다. 남쪽은 종성군과 경원군에 접하고 있는데 이는 문창학이 1922년 1월 5일, 경원군 신건동에 있는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왜냐하면, 문창학의 고향 온성군과 신건원 주재소가 있는 경원군은 서로 이웃하는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게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창학은 훗날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백성들을 탄압하는 일본 순사를 죽이는 거사를 치를 때 먼저 도착하여 불빛으로 신호하는 임무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직 피 끓는 조국애로 우리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절연한 각오로 일본 경찰지소를 습격했던 문창학은 청년 시절에 꿈도 많았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고 한다.

 

   함경산맥()은 문창학이 살던 온성군 미포면까지 뻗어내려 낮은 구릉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문창학의 고향은 추운 다른 지역에 비해 농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특히, 중국과 국경을 이루는 두만강은 이 지역에 넓은 범람원을 발달시켜 논농사를 비롯하여 콩·보리·밀·조·수수·옥수수·감자·쌀 등을 재배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두만강(滿)’이라는 ‘두만(滿)’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콩이 가득하다’라는 뜻이다. 물론, 두만강1)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지만, 글자 그대로를 해석하면 두만강 지역이 콩을 비롯한 밭농사가 아주 잘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두만강이라는 맑은 물과 농사짓기 좋은 평야지대를 형성하고 있는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가진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에서 태어난 문창학은 어렸을 때부터 풍요로운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고 한다.

    문창학이 살던 집이 바로 여관을 하던 집을 샀기 때문에 방이 22칸이나 되었다고 한다.2) 농사지을 땅이 많아 부농이었던 문창학은 부러울 것이 없이 다복하게 자랄 수 있었기 때문에 꿈도 많았다. 튼튼한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청년 문창학은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꿈도 꾸었고, 아버지처럼 고향을 지키며 지역 발전에 이바지 하는 훌륭한 마을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꿈도 꾸었으며, 멋진 제복을 입고 나라를 지키는 씩씩한 군인이나 경찰관이 되어야겠다는 꿈도 꾸었다. 그러나 문창학의 밝은 미래를 설계하는 아름다운 꿈은 1910년, 한일합방이라는 나라를 잃는 치욕적인 사건으로 말미암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문창학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나라 잃은 깊은 슬픔에 빠져 도무지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나라가 일본에 빼앗겨도 두만강 푸른 물은 잘도 흘러갔다.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려도 조국을 잃은 현실은 바뀌지 않고 일본인들의 극악무도한 횡포는 날로 더 심해져만 갔다. 이제 29세의 문창학이 나라를 위해서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어둠 뿐이었고 조국 광복의 찬란한 빛은 문창학에게는 더 이상 꿈도 꾸지 못할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창학 선생

   일본군경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을 문창학이 주도하다

   문창학의 좌절의 시간은 지루했다. 어떤 삶의 목표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서 도무지 잠을 청할 수 없는 많은 밤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문창학이 방황하고 있을 때 이웃한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일찍이 러시아로 망명한, 평소 존경해오고 있었던 10년 연배의 사촌형 문창범이 구세주처럼 그를 찾아왔다.

   문창범은 경원군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신건동 일대에 대해선 훤하게 꿰고 있었다. 문창범이 다녀 간 뒤로 문창학은 신건원 주재소의 일본 헌병보조원으로 들어간다. 문창범은 이미 이때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러시아를 중심으로 전방위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니까 문창학이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바로 사촌 형이었던 문창범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교통총장 문창범 선생 ⓒ독립기념

   혹자는 문창학이 신건원 주재소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했던 경력을 가지고 여러 가지 추측을 내놓는다. 그러나 1922년 1월 4일 오후 8시, 중국 화룡현()을 떠나 1월 5일 오전 12시 40분까지 잠복하여 자신이 근무하던 함경북도 경원군 신건원 주재소를 목숨 걸고 습격한 것을 보면 문창학이 신건원 주재소에 헌병보조원으로 일한 것이 혹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사촌형 문창범과의 돈독한 친분 관계로 볼 때 문창학이 주도하여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어쩌면 미리 철저히 준비하고 계획된 일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다.

   문창학은 어떻게 하면 조국이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신건원 주재소에서 직접 목격한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 헌병들의 잔악한 횡포가 이가 갈렸다. 죄도 없이 끌려와 일본 헌병들의 군화 발에 무참히 짓밟히고 피를 흘리는 불쌍한 동포들을 보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온 몸을 몸서리쳤다. 문창학은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린다.

   “미래에 대한 밝은 꿈을 꿀 수 없는 암흑의 시대에서 더 이상 비굴하게 사느니 차라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어!!! 대한의 동포들을 위해- 조국을 위해-. 만세! 만만세!!!”

   그리고 1919년 기미년 3월 1일, 문창학은 죽기 살기로 “대한독립만세”을 외치며 태극기를 번쩍번쩍 들어 올린다. 문창학은 태극기를 힘차게 들어 올리며 고향 함경북도 온성의 두만강 푸른 물에서 멱 감고 고기 잡던 행복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죽기를 각오했지만, 3·1 운동에서 살아 돌아 온 문창학은 다시 조국의 광복을 위해 골똘히 궁리했다. 그리고 4년 선배이자 대한군정서() 김학섭 동지의 의견에 따라 1922년 1월 2일, 웅기항()을 습격하기로 결정한다.

   “이번엔 김학섭 동지의 의견에 따라 웅기항()을 습격해야겠어. 일본 놈들이 우리 땅에다 자신들의 해군기지를 건설해 놓고 우리 조선 백성들의 생산품들을 마구 착취해 가는 꼴을 더 이상은 두고 보지 않겠어. 내 몸이 부서지는 그날까지 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우다가 죽겠어.”

웅기항 ⓒ독립기념관

웅기항 본정

 

   문창학은 웅기항을 습격하기 위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웅진항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러나 연말연시를 맞아 일군경이 합동으로 특별 경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거사를 치루기도 전에 붙잡힐 상황이었다. 문창학을 비롯한 다른 동지들은 일단 웅기항 습격 계획을 철회하고 문창학이 근무하여 모든 정보를 입수한 신건원 주재소를 습격하기로 결의했다.

   신건원 주재소 습격을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문창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건원 주재소 헌병보조원으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던 문창학은 신건원 주재소 안에 일본 순사들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으며 어떤 쪽으로 들어가야 들키지 않을 수 있으며 어느 순간에 거사를 치뤄야 그 일이 성공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봉주자로 제일 먼저 신건원 주재소로 향했다. 문창학은 모두가 고요히 잠든 1922년 1월 5일 새벽 12시 30분경3) 신건원 주재소에 도착했다. 온통 세상이 어둠으로 깜깜한 이 시각, 문창학은 불빛으로 동지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그 신호를 본 김학섭을 비롯한 모든 동지들은 10분 뒤 일제히 빗발 같은 사격을 시작했다. 급기야 숙사에 머무르고 있었던 일본 순사 송기안태랑()이 사살되었다. 그리고 숙사도 파괴되었다. 정말 순간순간 숨이 멈출 것 같은 긴장의 시간들이 연속되었다.

   조용했던 신건원 주재소는 일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일군경이 반격을 가해 오고, 이에 우리 독립투사들은 굴하지 않고 폭탄 2개를 투척하며 끝까지 일군경과 교전하다가 좋은 기회를 틈 타 신건원 주재소를 빠져 나왔다. 이로써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완전한 성공으로 마무리 짓게 된다. 이는 이곳 지리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문창학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신건원 주재소 습격 사건은 일본군경들에게 조선인들의 무서운 독립 의지를 보여 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준 우리들의 자랑스런 독립 투쟁의 역사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일본군경들에게 제일 안전해야 할 자신들의 안방인 주재소에서 두 눈 부릅뜨고 소중한 식구가 죽어나가고 주재소 건물이 파괴되는 어이없는 꼴을 목격하게 해 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은 이렇게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한 한마음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서슴없이 내놓았던 독립투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운 고향 두만강을 그리며 문창학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신건원 주재소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 독립투사들은 더욱 의기투합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온힘을 쏟아 부었다. 만주 혼춘에서 일경 습격과 밀정처단을 실행하는 등 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은 그 누구나 말리지 못할 정도로 맹렬했다.

  그렇지만 일본 경찰의 추적도 만만치 않았다. 1922년 12월 어느 날, 문창학은 김학섭() 등 독립투사 동지들과 일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청진으로 압송되었다. 문창학과 김학섭 등 13명은 1923년 5월 26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 무기징역, 10년 징역형 등 중형을 선고받는다. 1923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문창학과 김학섭은 공소가 기각되어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1923년 11월 8일, 역시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됨에 따라 1923년 12월 20일 사형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