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문] 건국의 아버지-이승만 대통령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최용일
'건국전쟁'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같은 속 시원한 독립운동은 못하면서 미국에서 편안하게 외교만 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 사람,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로 대한민국이 세워질 때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한 친일파, 6.25가 발발하자 한강 다리를 폭파해 국민들을 죽게 만든 사람, 독재 정치를 하다 4.19 로 하야해서 하와이로 망명한 사람 정도가 그동안 저의 인식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점 몇가지 적어봅니다.
1. 독립운동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은 전세계 3위권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일본군 7,000,000명 vs. 조선 독립군 2,000~3,000명
이승만은 군사적인 방법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고, 대신 미국 내에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는 여론을 만드는데 주력했습니다. 당시 일본에게 한국 통치를 맡길 생각까지 했던 미국이었는데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라는 책을 일본의 진주만 공격 전인 1941년에 펴내며 곧 일본이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경고했고, 미국이 한국을 독립시켜야만 동아시아로 확대하려는 일본 제국을 막아 동아시아에 평화가 오며 그것이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고 논리를 세웠던 인물이었습니다. 결국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미국이 참전을 했고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이 일본에게 승리하면서 우리나라의 독립이 이루어진 것이니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3.1운동, 105인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각지를 돌며 '조선에서 저렇게 일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은 왜 가만히 있느냐. 조선을 도와야한다'라며 미국내 여론 조성을 하였습니다.
2. 친일파인가?
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습니다. 독도를 우리 영해로 포함하는 평화선을 선포했고 독도로 향하는 일본 배를 해군을 동원하여 나포해 독도를 지켜냈습니다. 이승만 내각의 구성원과 북한 김일성의 구성원을 비교해 보면 북한이야 말로 친일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6.25 때 일본군이 지원을 올 것인지 미국이 의견을 묻자 그럴 경우 북한보다 일본군과 먼저 전쟁하겠다면서 강한 반일을 드러냈습니다.
3. 6.25 때의 행적
전쟁이 나면 국가 원수가 일단 피신해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차후의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만약 대통령이 용감하게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하면 그걸로 나라의 운명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대통령의 피신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6.25 때 국민들은 서울에 남아 있으라고 방송을 하고 본인만 도망쳤느냐? 영화에서 당시 이 대통령이 라디오로 방송한 녹음을 분석해 보니 어디에도 국민들에게 서울에 남아 있으라고 한 내용은 없었습니다. 누군가 왜곡 날조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늦추기 위해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것은 군사전략상 필요한 일이었는데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폭파해 애꿏은 국민들만 죽었느냐? 영화를 보니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경찰들에게 다리 폭파 위험을 알려서 국민들이 한강 다리 아래 부표를 이용해 도강하도록 안내하였습니다. 한강 다리 폭파로 사망한 민간인은 없고 경찰만 사망하였습니다.
4. 독재자인가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한 것이지 독재를 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게 영화의 주장입니다. 독재는 군부의 힘을 빌리거나 언론을 탄압하면서 강제로 집권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이승만은 민주적 절차에 의해 1대, 2대, 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2년 동안 대통령이 된 것이라서 투표에 의한 장기 집권일 뿐 독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4대 대통령 선거도 경쟁자 조봉암이 선거 기간 내 사망해서 이승만 본인은 단독 후보로 당선되었지만, 부통령 선거에 사사오입 같은 부정한 방법이 동원되어 (3.15 부정선거) 결국 4.19가 일어나자 스스로 하야한 것입니다. 대통령을 오래 하다 보니 주변 인물 관리와 자유당의 부정부패를 막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 이승만 본인이 독재자는 아닌 것입니다. 이승만이 독재자였다면 1960년의 4.19가 1980년의 5.18 처럼 강제 진압을 당했을텐데 이승만은 4.19로 다친 병상의 환자를 위문하며 눈물을 흘리고 깨끗이 물러났습니다.
5. 원자력의 아버지
1959년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고 한양대학교에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만들고 1959년 서울대에도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여 현재 우리나라 원자력 기술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6. 민주화
이승만 정권은 1948년 부터 20세 이상 전국 모든 남녀에게 모든 선거에서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했습니다. 당시 조선이라는 왕조국가와 일제 식민지에서 겨우 벗어난 시점이라 국민 대다수는 남녀평등이나 투표권의 개념도 생소할 때였습니다.
그리스가 1952년, 멕시코가 1953년, 스위스는 1971년, 포르투갈은 1976년에서야 남녀간에 완전히 동등한 투표권이 생긴 것을 보면 이승만이 얼마나 앞섰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승만의 초대 내각 때 임영신을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관으로 만들었고 여성 판사, 여성 공학사, 여성 국회의원들이 이승만 시절에 등장하였습니다. 또한 원래 여성에게만 적용되던 간통죄를 1953년에는 남녀 모두에게 적용시켰습니다.
전국민의 초등학교 6년 의무교육을 실시하였고 여러 국문 보급소를 설치해 광복 당시 80%였던 문맹률을 1959년에는 22%까지 낮추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교육 받은 세대를 키워냈기에 3.15 부정선거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4.19 혁명이 일어나는 여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6. 하와이 망명
영화를 보다 보면 이 대통령이 망명을 원한게 아니었는데 하와이로 2주간 여행차 떠난 이 대통령을 기자가 왜곡해 망명해 버렸다 (도망갔다)고 보도해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어떤 언론인지는 영화를 보시면 나옵니다.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영화였습니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제대로 평가해야 하는데 한쪽의 프레임 만으로 역사를 평가해 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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