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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현의敎育樂書]남 중심의 나비가 되라는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

원 시 인 2024. 12. 24. 16:41

[신호현의敎育樂書]  [에듀프레스] 남 중심의 나비가 되라는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

남 중심의 나비가 되라는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

   

   지금 세상은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성탄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면 그 시끄러움도 줄어들지 않을까 한다. 거리엔 캐롤송이 들리고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거린다. 사람들은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한다. 성탄절에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들과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맛난 음식을 먹는다. 저마다의 행복한 삶을 위해 학생들은 공부를 하고 직장인은 열심히 일하고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한다. 저마다 열심히 살아도 세상은 언제나 시끄럽고 불안하다.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석가탄신일에도 그냥 공휴일이라서 놀러다니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오신 날의 진정한 의미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말라국의 고타마 싯다르타는 어찌하여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인류 구원의 길을 위해 설산으로 떠났을까. 하나님의 실존을 보지 않고 믿지 못하는 인간들을 위해 성육신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누구신가.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에 떠오르는 단어를 물으면 37%의 학생들이 '선물'이라 한다. 2위는 '산타'가 27%, 3위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21%, 4위에 '예수님'이 11%이다. 학생들은 석가탄신일이나 성탄절의 본래적 의미보다는 그 날에 보이는 이미지로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 기념일은 이미지보다 그 본래적 의미가 중요하다. 석가탄신일에는 석가가 누구이고 왜 그러한 삶을 살았는가. 예수님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 가르쳐야 한다.

    요즘 들어 종교의 가치를 무시하고 자기만의 삶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 참으로 딱한 일이다.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를 때 보면 전통방식의 유교식, 불교식, 그리고 요즘엔 기독교식 장례를 많이 치른다. 물론 교회를 안 다녔다면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면서 절을 하고 제사 음식을 드리는 혼합 형태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죽어서 극락에 갔다거나 천국에 갔다고 하면 상주들도 위로가 된다.

    우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태어나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살다가 죽을 때에는 두 주먹을 편다. 그리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욕심을 가지고 비뚫어진 생각을 품으면 이기적인 모습으로 남을 속이고 사기치고 피해 끼치며 산다. 그래봐야 죽어서 가져가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곧 죽을 줄도 모르고 욕심껏 산다. 남을 속이고 빼앗는 삶은 고칠 수가 없는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량하게 살지만 어른들이 가장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정치이다. 가장 이기적인 사람들이 당을 만들어  자신의 이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유물론적 사고에서는 행복이 물질에 있기에 이기적 사고는 더 많이 가지려 애쓰게 된다. 남을 거짓말로 속이고 빼앗더라도 많이 가지면 승리하고 행복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많이 가져도 불안하고 행복하지 않다. 진정한 행복은 이웃과 함께 나누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관념론적 사고로 비물질적이고 정신이 고도화된 철학적 사고이다. 우리 사회는 물질이 팽배하여 철학적 사고가 힘을 잃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정신이나 청빈사상은 물질주의 앞에 무너져 부귀영화만이 진정한 행복이라 생각한다. 눈에 보여야 하고 만질 수 있는 성경 속에 '도마'같은 사람들이 자꾸 행복을 눈에 보이는 잣대로, 손에 만져지는 잣대로 생각한다. 컴퓨터가 발단하고 4차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AI시대에 사람들의 생각은 이미지화 하고 유물화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이미지 정치와 유물화 정치가 사람들을 현혹하기 쉽다. 멋있게 보이고 돈을 손에 쥐어주면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어쩌면 석가모니나 예수님은 일찍이 세상이 이렇게 물질주의와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인류를 관념주의 철학으로 나아가게 하는 깨우침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성인들은 인간의 철학 영역을 뛰어 넘어 신학의 범주에 도달한 것이다. 철학가의 정신세계는 철학으로 남겠지만 성인들의 깨우침은 종교가 된다. 믿든지 믿지 못하든지 석가모니는 인간의 깨달음으로 성인이 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인간에게 깨우침을 주고 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죄로 단절되어 끊임없이 죄짓고 불안해 한다. 그러니 많이 가져야 불안하지 않을까 생각하니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많이 가지려 한다. 이웃에게 나누려 하거나 더러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러니 불교나 기독교나 끊임없이 '부모님께 효도하라, 이웃과 함께 나눠라.'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웃과 나누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다. 

     당나라 때 인재등용의 4가지 원칙인 '신언서판(身言書判)' 중에 판단력에서 '나 중심으로 판단하는가, 남 중심으로 판단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것이 인성인데 공직자나 정치인들이 '나 중심'인지 '남 중심'인지 판단하면 훌륭한 사람을 분별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나 중심'인지 '남 중심'인지 판단하면 훌륭한 사람인지 알 수 있고 그 판단의 잣대가 되는 것이다. 슈바이처가 '나 중심'의 인물이었다면 아프리카는 여전히 암흑의 땅이었을 것이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은 교직생활 30년 넘게 하면서 학생들에게 꾸준히 읽힌 책이다. 땅을 기어다니는 애벌레가 고치 속에 들어가 인고의 시간을 겪고 나면 날개를 달고 나비가 되는 거듭난 삶을 볼 수 있다. '기어다님'은 '날아다님'으로, '나뭇잎을 먹던' 애벌레는 '꿀을 빠는 삶'으로, 지나간 자리에 '똥'이 남던 삶에서 '화분'이 남아 꽃들이 열매를 맺게 돕는 멋진 삶이 되는 것이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은 세상에 태어나 남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로서의 나비가 되라는 멋진 교훈을 담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둠에 땅에 들어가 자신을 희생하면서 '빛과 소금'의 존재가 되는 것은 '남 중심'의 관념주의 철학을 깨달은 사람만이 가능하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게 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진전한 행복을 생각하게 하는 성탄절에 '믿음 있는 자'로 거듭나려거든 성경을 읽으면서 '나 중심'에서 '남 중심'으로 거듭나게 되라는 것이 '성탄절의 진정한 의미' 아닐까. 먹고 마시는 즐거움보다 이웃과 함께 나누는 행복을 깨닫게 되면 지금의 탄핵 정국의 시끄러운 정치는 평안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