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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국민정서의 꽃(교과서 개편을 보며)

원 시 인 2010. 2. 9. 00:29

                                     교과서, 국민정서의 꽃



   지난 회식에선 영화 한 편이 도마에 올랐다. 최근 개봉한 ‘브르스올마이티’라는 영화이다. 브르스는 승진에 탈락되는 등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현실에 강한 불만을 품는다. 그러자 그는 현실을 이끌어가는 신에게 자살함으로서 적극적인 반항을 시도한다. 그 때 신이 나타나 신의 능력을 일주일 빌려주고 그로서 여러 가지 제멋대로의 삶을 추구하다 비로소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참 지혜를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클럽활동을 마무리 하면서 여러 선생님들이 함께 관람을 했는데 회식자리에서 회자(膾炙)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미처 느끼지 못한 영화의 의미가 저마다의 평론으로 다시 살아왔다. 감상적인 비평론자들은 브르스의 손가락이 7개로 변할 때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랐다느니, 브르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달을 끌어당겨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장면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브르스처럼 자신도 신의 능력을 빌렸으면 한다. 형식적인 비평론자들은 영화의 구성이 지루했다고 한다. 커다란 굴곡이 없이 코믹한 연출에 신경을 쓰느라 감동이 부족하다고 한다.

   한 편의 영화가 회식자리에서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저마다의 삶에 어떤 감동을 불러오는가를 통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나 삶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이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사는 우리가 삶을 나누며 공유하는 소재가 된다. 한 직장에서나 한 나라에서, 아니 작게는 한 가정에서 가족들이 공유하는 소재가 많을수록 그 가정은 이야깃거리가 많고 그 이야기를 통해 행복을 만들어 간다.

   교과서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국민 공통의 정서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의 꽃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한 자리에 앉아 교과서 속에 시를 외우고 소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배웠던 ‘큰바위 얼굴’이란 소설을 기억한다. 물론 그 소설은 나의 큰형도 배웠고 둘째형도 셋째형도 배웠다. 큰바위 얼굴에 주인공 어니스트는 큰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위대한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큰바위 얼굴과 닮은 사람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던 ‘게더골드’나, 전쟁의 영웅이었던 ‘올드블러드앤썬더’ 장군이나, 정치적 명예를 얻었던 ‘올드스토니피즈’와 같은 인물이야말로 큰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이라 생각하고 한 때는 그들을 존중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새로운 시인이 출현함으로서 시인이야말로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목사가 되어 진실하고 정직한 행실에서 우러나는 설교를 하는 어니스트야말로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외친다.

   이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교과서적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의 의미를 내가 배울 때는 몰랐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 살수록 가슴 저편에서 솟아나는 이 소설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느낌으로 다가오는 깨달음….

   큰 형은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삶 속에서 계속되는 승진을 꿈꿨고 지금은 지역에서 알아주는 사람으로 명예를 얻었다. 둘째형은 군인이 되었고, 셋째형은 가난이 싫어 부자가 되겠다고 커다란 슈퍼맨(슈퍼 주인)이 되었다. 나는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내 인생에 큰 방향이 되었다.

   우리 형제는 가끔 모이면 인생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럴 때면 큰 형에게선 올드스토니피즈의 냄새가 나고 둘째형에게선 올드블러드앤썬더 장군의 냄새가 나고, 셋째형에게선 게더골드의 냄새가 난다. 그럼 난 세상의 그런 것은 다 필요 없고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아이들은 충실히 가르치고 인생을 한 편의 시로 읊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내가 나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주인공 어니스트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내가 선생이 되어 학생들에게 큰바위 얼굴이란 소설을 가르칠 때면 나는 힘이 마구 솟았다. 이 소설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으로 한참 인생의 가치관을 세우는 청소년들에게 더 없이 값진 소설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 소설뿐만이 아니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러하고, 폴 빌라드의 ‘이해의 선물’ 또한 그러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소설의 참의미를 가슴으로 깨닫는 글들의 모음이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교과서는 시대와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물론 틀린 내용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옛것은 구태의연(舊態依然)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분별하게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만들어진 7차 교육과정의 교과서 속에는 이런 소설들이 많이 바뀌었다. 이 소설들보다 교육적으로 더 중요한 소설들이 많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왠지 반평생 몸에서 우러나는 인생의 의미를 힘주어 가르칠 가슴속 진실이 없어졌다. 새로운 교과서를 배운 아이들과 그 부모세대는 다시 단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통된 대화를 찾기 힘든 것이다.

   가정에서 아빠와 엄마가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낯선 내용들을 접하게 됨으로서 자녀와 학습 내용을 두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줄어든다. 사회 직장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교과서 속에 인물을 비유하여 설명한다거나 학창시절 교과내용을 상기한다는 것은 이질감을 불러오는 요소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보이지 않게 교과서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놓게 되는 것이다.

   이번 7차 교육과정 속에 바뀐 국어 교과서는 한 마디로 너무 조잡한 느낌이다. 너무 많은 것을 제시하려다 보니 부분 발췌가 많이 들어갔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제시하다보니 가르침의 틀에 얽매일 우려가 있고 제시된 문항 자체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포괄적이다. 인성 교육을 중시하다보니 국어교과서인지 도덕교과서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니 교과서에 치중하려니 선생님은 가르친 내용이 없고 학생들은 배운 내용이 없는 느낌이다.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려니 나름대로 준비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가르쳐야할 내용이 더 많아진다. 교과서를 무시하자니 학생들과 학부모, 교육청, 교장님들이 불안하다. ‘왜 교과서를 안 가르치냐’고 물으면 대답하려는 노력이 변명이 된다.

   교과서는 단지 기본만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몫이다.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의 만남에 매개체(媒介體)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만남, 인성의 만남, 문학과의 만남 등 각 교과목마다의 목표를 향해 교사와 학생이 손잡고 달리게 하는 출발선이다. 교과서가 출발선이자 결승선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교과서로 하여금 모두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교사를 믿지 못하는 교과서는 이미 교과서가 아니다. 교과서로 교사를 바꾸려는 의도는 교과서를 조잡하게 한다. 기본만 제시되었다고 기본만 가르치는 교사는 없다.

   교과서의 내용은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하며, 한 번 선택된 내용은 대체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持論)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은 단지 학창시절에 시험을 치루기 위한 암기의 수단만은 아니다. 또한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의 그릇된 사고를 즉흥적으로 바꾸려는 인성지도 중심의 도덕 교과서처럼 되어서도 안 된다. 국어든 수학이든 영어든 교과서의 내용을 통해 평생을 배우는 인생의 표본(標本)이 되어야 한다. 교과서 속에서 ‘국민 공통 정서의 꽃’을 피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