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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시간에 논술 읽기]조선일보 <태평로> 영전에 꽃 바치고 뒤에서 웃는 학생들

원 시 인 2012. 9. 15. 09:30

<중학교 국어시간에 논술 읽기>

[태평로] 靈前에 꽃 바치고 뒤에서 웃는 학생들
                                                                            입력 : 2012.09.13 23:03

최근 학교 폭력 가해 학생 부모 중 중·상류층 많아
'모범생' 자녀들이 친구를 짓눌러도 되레 큰 소리 치고 죄의식도 없어… 교사들은 침묵…

 
  윤영신 사회정책부장
    학교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다 빌딩에서 뛰어내린 학생의 빈소(殯所)에 가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왔다. 그들은 소녀의 영전(靈前)에 국화를 바치고 머리를 숙여 유족을 위로했다. 그러나 가해 학생들과 그 부모들의 이 모든 참회 표시는 진심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빈소 밖으로 나와선 키득거렸고, 그 부모들도 "(자살한) 그 학생이 잘못된 애 아니었느냐"고 소곤댔다. 그 모습이 고인의 친척 눈에 들어왔다. 겉과 속이 달랐던 그들의 조문은 죽은 소녀를 또 한 번 죽였다. 아마 드라마나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면 윤리 문제에 걸려 삭제됐을 것이다.

    지금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는 학교 폭력은 과거와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가해자 부모가 더 큰 소리를 치는 사례가 많아졌다. 자기 자식이 저지른 일이 학생부에 기록되면 입시에 불리해지기 때문인지 "내 아이는 잘못 없다. 증거를 대라"고 우긴다. 여러 부모가 합세해 사건을 덮어버리거나, 피해 학생을 원인 제공자로 몰아붙여 쌍방 피해 사건으로 만들거나, 아예 피해 학생을 가해자로 둔갑시킨다. 가해자 부모들의 이런 짓에 피해 학생 부모의 멍든 가슴은 또 한 번 타들어간다.

    둘째, 가해 학생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財力)이 중·상류층에 속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들 밑에서 어릴 적부터 더불어 사는 법은 배우지 못한 채 1등주의와 경쟁의식만 세뇌(洗腦)당한 학생이 많아졌다. 이런 아이들이 사교육을 많이 받고, 그래서 공부를 어느 정도 하고,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친구를 괴롭히고 폭행하는 일이 과거보다 흔해졌다. 마치 정글에서 사자가 먹잇감을 노리듯, 약한 학생을 표적 삼아 누적된 공부 스트레스와 불만을 퍼붓는다. 그리고 사건이 커지면 '힘센 부모'는 방패가 되어준다. 자식을 위한다며 그렇게 하지만 그건 자식을 더 망치는 길이다. 최근 불거진 학교 폭력 사건에서 이런 공통점이 발견됐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잘사는 사람은 부(富)를 더 쌓고, 못사는 사람은 가난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드는 계층 고착화가 사교육의 불균형과 학부모 영향력의 불균형을 낳았고, 이런 현상이 학교 안에 거울처럼 스며들었다. 학생들 사이에도 강자(强者) 집단과 약자(弱者) 집단의 계층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부모의 힘이 곧 학생의 힘이 됐다. 강자 집단에 속하게 된 학생 중엔 가정교육을 잘 받아 올바르게 자란 아이도 물론 많다. 하지만 인성(人性)이 비뚤어진 '힘센 부모' 밑에서 버릇없이 자란 아이들이 교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앉아 약한 학생을 못살게 굴거나 폭력을 배후 조종하는 경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진보 교육감'이란 사람들은 "학교 폭력 사건을 학생부에 기재하지 말라"며 그들 앞에서 아양을 떨고 있다.

    셋째, 일부 교사의 무관심과 나약함이다. 누가 죄를 짓고 누가 벌을 받아야 할지를 심판하고, 피해 학생을 치유하고 가해 학생을 바른 제자로 거듭나게 해야 할 교사들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피해 학생과 가족은 주눅 들어 죄지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죄지은 학생과 부모는 죄의식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는데도 진실을 아는 교사들이 입을 다문다. 소신껏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보다 침묵하는 교사가 많은 한 학교 폭력은 영원할 것이다.

    죄지은 자와 희생자의 처지가 뒤바뀌고, 공정(公正)과 도덕·규율은 힘을 잃고 불의(不義)와 도덕불감증·폭력이 득세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대한민국 교육 현장이다. 바른 부모, 바른 스승 밑에서 비뚤어진 자식, 막된 제자가 나오지 않는 법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13/20120913029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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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학교를 들여다 보는 맑은 눈

 

 

    애들아! 우리 [국어시간에 논술읽기] 시간으로 오늘은 조선일보 사회정책부장 윤영신 님의 글을 읽어 보자. 대학입시에서 논술의 비중이 많이 차지함에도 중학교에서 논술에 대한 관심이 낮아 고등학교에 가서야 논술 공부에 불똥이 떨어지니 중학교에서 논술 공부를 튼튼히 해보자. 선생님이 국어시간에 '그림으로 그리는 논술'을 통해 논술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르쳐 주었지? 그러니 이제는 신문의 있는 논술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지렴. 그리고 선생님이 내 준 수행평가 과제를 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먼저, 이 논술은 요즘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의 희생되었던 학생의 빈소를 찾은 가해 학생과 학부모들의 태도에서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피해 학생의 영전에 국화를 바치고 돌아서 밖으로 나와선 키득거리는 모습과 학부모들이 피해 학생을 비난하는 모습에서 도덕성이 결여되었다고 보고 가해 학부모와 학생들의 윤리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특징과 원인을 밝혀 보려는 의도에서 논술하였는데 그 모습을 서론에서 찾아볼 수 있단다.

    이 논술은 선생님이 여러분에게 가르쳤던 논술의 기본 구조를 잘 드러낸 논술이란다.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이 여섯 문단으로 잘 구성되었고, 본론 쓰기에서 첫째 둘째 셋째의 열거식 방법으로 서술한 논술이란다. 열거식 방법은 논술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기법으로 글쓰는 사람과 글 읽는 사람이 가장 쉽고 명확하게 내용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교장선생님의 훈화나 목사님의 설교에서도 많이 쓰인단다. 들여쓰기 문단을 중심으로 둘째 특징이 둘로 나눠진 여섯 개의 문단을 한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논술의 형식을 잘 읽은 것이란다.

     그러면 논술의 내용을 살펴보자구나. 서론의 문제제기에서 가해 학생들과 부모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조문은 인간 윤리에 어긋났다고 서술하고 있단다. 학교 현장에서 요즘 두드러지는 이런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의 특징을 세 가지 측면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이 보이니? 

     첫째 특징은 가해자 부모가 더 큰소리치는 사례가 많아졌다고 지적하고 있지. 가해 부모들이 합세하여 피해 학생의 잘못으로 몰아 오히려 가해자로 몰아가거나 원인 제공을 핑게로 쌍방의 잘못으로 같이 손해를 보거나 아예 사건을 덮어버리는 경향을 지적하고 있단다. 그래서 피해 학생과 부모의 멍든 가슴이 또 한 번 타들어 간다고 했지. 이 얼마나 통쾌한 지적이었니? 정말 학교 현장에서 보면 피해 학부모들도 큰소리치지만 가해 학부모가 더 큰소리치는 모습에서 학교 선생님들은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모를 때가 많단다. 학생들 싸우고 화해시키는 것보다 문제를 확대시키는 학부모들을 화해시키는 것이 더 어렵단다. 어디 학교만 그렇겠니? 사회에 나가면 시위대가 경찰을 때리고, 폭력배가 경찰서를 파괴하고, 심지어는 학생이 선생님을 때려도 제대로 따끔한 처벌을 못하니 그렇겠지. 여기서 이런 특징을 열거하는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더 탐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지.

   둘째 특징으로 가해 학생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중상류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하고 있단다. 사교육을 통해 공부잘하고 번듯한 모범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공부 스트레스를 풀듯 친구들을 괴롭히는 학생들이 늘어난다고 보고 그 '힘센 부모'들은 방패가 되어준다고 지적하고 있단다. 둘째 특징의 두 번째 문단에서는 그 원인을 살피느라 문단이 나눠졌단다. 그 원인은 잘 사는 사람들과 못 사는 사람들의 계층 고착화가 사교육의 불균형을 낳고 학부모 영향력의 불균형을 낳게 되는 계층 관계로 보고 학급에서 '힘센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약한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보고 있단다. 좀더 비약해서 진보교육감이 '학교폭력을 학생부에 기재하지 말라.'는 내용도 비판하고 있구나.

   문제는 셋째에서 볼 수 있단다. 일부 교사의 무관심과 나약한을 특징으로 들고 있는데 여기서는 '일부' 교사들이라고 전제하고는 뒤에서는 대부분의 교사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듯이 서술하고 있단다. 우리가 논술에서 주의해야 할 것 중에 일부 사실을 마치 대부분이 그런듯 비약하는 것이란다. 심지어는 죄지은 학생과 그 부모가 죄의식도 미안함도 느끼지 않고 버젓이 살아가는 것이 마치 교사들이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는 데에 있다고 단정하고 있구나. 그러니 글을 읽다보면 서론에서 가해자 학생들과 학부모의 잘못이 교사들의 진실을 외면하는 침묵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주장이란다. 둘째 특징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문단 하나를 더 구성했다면 셋째 특징에서도 교사들의 무관심과 나약함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문단을 하나 더 만들어 서술해야 한단다. 그럼에도 '침묵하는 교사가 많은 한 학교폭력은 영원할 것이다.'라고 전망까지 하고 있구나.

     결론에서는 한술 더뜨고 있지. 죄지은 자와 희생자의 처지가 뒤바뀌고, 공정과 도덕 규율이 힘을 잃고, 도덕 불감증과 폭력이 득세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의 교육 현장이라고 하고 있구나. 물론 따지고 보면 가정에서 부모교육이 잘못되었고, 학교에서 학교교육이 잘못되었다면 맞는 말이란다. 그런데 이 글을 읽고 논술의 목적인 '설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심히 불쾌하고 반감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논술을 쓸 때 여러분이 주의해야 할 것은 어느 하나의 현상을 어느 하나의 원인이나 책임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단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누누이 강조하지만 우리의 눈에 보여지는 하나의 현상은 어느 하나나 둘의 원인과 근거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어느 물건이 만들어질 때 그 모양과 색깔, 크기, 디자인, 기능, 효율성 등 너무나 많은 요인들이 작용하여 하나의 현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 많은 요인들 중에 아주 그럴 듯한 세 가지 정도를 찾아 근거를 들어 제시하는 것이 논술이란다. 논리라는 것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이유나 근거가 명확할 때 타당성을 얻게 되고 그 타당성으로 설득을 할 수 있으며 감동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란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 인권조례 발표'와 '체벌 금지'로 많은 선생님들의 손발이 묶여 있단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학부모가 찾아와 난동을 부려도 선생님으로 같이 싸우지도 못하고 인내하며 가르치고 있단다. 물론 인내하지 못하는 선생님들은 명퇴를 신청하는데 최근들어 명퇴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너희들도 잘 알고 있지? 그럼에도 남은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대화를 통한 상담으로 이끄느라 늦은 시간까지 퇴근을 못하는 선생님들이 많단다. 

    논술하신 윤영신 부장님이 학교 현장에 발을 들여 놓으신지 언제인지 의문스럽지 않니? 혹시 신문에 난 기사들을 통해 학교를 들여다 보시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지 않니? 너희들도 알지? 신문에 나는 극히 일부의 학생들의 사례로 전체 학교 현장을 들여다 본듯이 논리가 비약되었다는 것을. 윤영신 부장님이 우리 학교에 오시면 학교가 얼마나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곳인가를 보여드릴 텐데 어쩌지. 

     애들아! 우리 언론에서 우리 학교를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아도, 선생님들을 왜곡 보도하여도 너희들은 현혹되지 말거라. 간혹 왜곡된 보도로 인해 선생님들을 비뚫어지게 바라보고 학부모들이 학교를 욕해도 너희 심지는 학교를 바르게 보고 너희 미래의 꿈을 열어 주시는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하길 바란단다. 선생님은 너희들의 해맑은 인사를 받고 너희와 더불어 즐겁게 웃으며 수업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단다. 그 행복을 학교와 선생님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지니신 윤영신 부장님께 보여드리고 싶구나. 그리하여 '행복한 학교를 들여다 보는 맑은 눈'을 갖도록 해드리고 싶구나. 

 

                                                                                        2012년 9월 15일에

                                                                            21세기 원시인 신호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