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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시]독립운동의 전략가-청사 조성환(詩신호현)

원 시 인 2017. 3. 19. 07:45

[인물시]  1994년 10월 독립운동가

 

독립운동의 전략가

 

        - 청사 조성환

 

지난 며칠 간 날이 맑다고

비올 때를 대비하지 않겠는가

전후좌우 적들은 창궐하는데

전쟁 없다고 군대 줄이겠는가

 

구한말 썩은 고등어 같은 군대

부패척결로 사형선고 받았노라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 조직하여

국권 회복 위해 목숨 바쳤노라

 

체코 망명 라돌라 가자 장군 만나

기관총 사들여 청산리 승리했노라

임정 군사특파단 단장으로 침투해

독립군 키우고 광복군 창설했노라

 

독립운동가 연합전선 구축하여

대일 전선 통일 동맹 결성했노라

아아! 이 땅에 조국독립 왔다지만

갈라진 가슴은 이리도 시리다뇨

 

詩 신 호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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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투브 : https://youtu.be/BgjvQJwU88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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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낙원동(樂園洞) 사람이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이갑(李甲), 이동녕(李東寧), 김구(金九), 전덕기(全德基), 이승훈(李昇薰), 안태국(安泰國), 노백린(盧佰麟)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일단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이곳을 근거지로 간도(間島), 노령(露領) 등지를 편력하면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다지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1912년 그는 만주를 시찰하러 온 일본 총리대신(總理大臣) 계태랑(桂太郞)의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거제도(巨濟島)에 1년간 유배되었다가 재차 상해로 건너갔다.

1916년 9월 그는 신규식(申圭植), 민충식(閔忠植), 박은식(朴殷植) 등과 체화동락회(棣華同樂會)를 조직하여 교민의 단결 및 재외한인단체와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항일운동에 종사하였으며,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열을 올렸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吉林)에서 대한독립선언(大韓獨立宣言)을 발표하여 한국민의 독립의지를 공표하였는데, 그는 39명의 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이전 그는 노령(露領) 니콜리스크에서 유동열(柳東說) 등과 무력투쟁을 계획하다가,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하게 되자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김동삼(金東三), 조영진(趙英鎭), 조소앙(趙素昻) 등 30여 명과 함께 1919년 3월 하순 노령에서 상해로 와서 임정에 참여하였다. 동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에서 개최된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노령을 대표하는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겸하여 군무차장에 임명되었다. 4월 23일에는 차장제를 위원제로 바꿈에 따라 군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날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그는 박은식 현상건 신채호 등과 함께 평정관(評定官)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력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다시 만주로 나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그는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등 독립군의 무장을 위하여 적극 활동하였으며, 동년 10월 청산리독립전쟁에 대승한 북로군정서 및 대한독립군, 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10개 독립운동단체들이 1920년 말 밀산(密山)에 모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여 서일(徐一)을 총재로 추대하게 되자 그는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부총재에 선임되어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노령으로 들어갔다. 노령 이만에서 이청천,(李靑天), 최진동(崔振東), 오하묵(吳夏默), 홍범도, 안무(安武),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그는 고려의용대를 조직하고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백계(白系)러시아군 토벌작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공산당의 배반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당하는 커다란 손실을 입고 그는 북경(北京)으로 돌아와 임시정부 외무위원으로 중국정부와의 외교 교섭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을 계속하다가 북만의 동지들을 돕기 위하여 다시 만주로 복귀하였다.

1925년 3월에는 영안현(寧安縣)에서 김혁(金赫), 김좌진(金佐鎭), 나중소(羅仲昭) 등과 신민부(新民府)를 새로 조직하고 외교부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당시 신민부의 군세는 보안대, 별동대를 합하여 530여명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이들은 군세를 확장하기 위하여 목릉현 소추풍(穆陵縣 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년2기의 속성교육을 실시하였는데, 그는 이범윤(李範允)과 같이 고문에 추대되어 교육 훈련을 지도하였다.

1925년 10월 임시정부가 좀더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위해서 이상룡(李相龍)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자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탁(李沰), 김동삼(金東三), 오동진(吳東振), 이유필(李裕弼),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그를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만주에 머물러 무장투쟁을 계속하면서 취임하지 않았으며, 1926년 2월 18일 국무원에서 전원 해직되었다.

1926년 그는 북경으로 가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촉성보(促成報)를 발행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단결과 단합을 호소하였다. 이를 위해서 만주와 상해에 조두진(趙斗珍), 장건상(張建相) 등을 파견하여 선전에 주력하였으며, 1927년 11월 14일 이러한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어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그는 북경대표로 참석하여 이후 한국독립당 발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31년 12월 24일 제23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윤기섭(尹琦燮),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등과 경기도 의원에 다시 선출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국무위원에 선임된 이후 광복시까지 군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 계속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39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황학수(黃學秀), 이준식(李俊植), 왕중량(王仲良) 등과 화북(華北)지구에 파견되어 병사모집, 군사훈련 등의 임무를 수행하여 광복군 창설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40년 5월에는 중경(重慶)에서 3당(朝鮮革命黨, 韓國國民黨, 韓國獨立黨)통합운동을 벌여 민족진영의 정당을 연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설하고 그 중앙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임시정부의 운영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여 임정요인들과 같이 환국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 유도회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다가 서거하여 효창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