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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시]슬픈 독립의 깃발-채상덕 총장(詩신호현)

원 시 인 2017. 8. 9. 00:24

[인물시]

 

슬픈 독립의 깃발

 

           - 채상덕 총장

 

 

황해도 사람으로 의병되었다가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 펼쳤으니

흩어진 독립군 모아 새 꽃 피우니

대한통군부 총장에 선출되었더라

 

큰 강물 대한통군부는 흐르다 

통의부와 의군부로 나뉘어지니

그 거센 물결이 갈라져 얽혀지니

독립운동의 폭풍 물결 약해지더라

 

대한민국 국내 진공 작전 위해

참의부 군사 별들 모여진 자리에

밀정 일경 급습하여 모두 전사하니 

그 소식 분개하여 자결순국하셨더라 

 

오호라, 조선 독립의 푸른 꿈은

만주 하늘에서 더욱 붉기만 한데

빛바랜 승냥이 붉은 기운 흐리니

슬프구나. 조선 독립의 깃발이여 

 

詩 신 호 현

 

국가보훈처 : 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_photo.asp?id=463&ip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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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덕, 그는 누구인가

 

    : 심호(深湖), 황해도 사람이다.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기거하면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전개하였다.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 이후 남북 만주 각지의 독립군들이 각 지역별로 분산되고 그 이념마저도 분리되어서는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22년 2월에 이르러 남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비롯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광한단(光韓團)·보합단(輔合團)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회의를 거듭하여, 1922년 2월에 이르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채상덕은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그와 함께 통군부에서 활동한 인물들로는 비서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군사부장 이천민(李天民), 교육부장 김동삼(金東三),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경무감 전덕원(全德元)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한통군부가 성립된지 얼마 안되어서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운동이 다시 전개되어, 1922년 8월에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가 개최된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부총장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대한통의부에서 그와 함께 활동했던 주요 인물로는 총장 김동삼(金東三), 비서과장 고활신, 민사부장 이응해(李雄海), 검무부장 최명수(崔明洙), 교섭부장 김승만(金承萬), 선전국장 김창의(金昌義),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법무부장 현정경(玄正卿), 사판소장 이영식(李永植),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학무부장 신언갑(申彦甲),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식산국장 박득산(朴得山), 권업부장 강제하(康濟河),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교통국장 황동호(黃東浩), 참모부장 이천민(李天民) 등을 들 수 있다.

   아울러 통의부 의용군은 이 때 대대, 중대로 편성되었는데, 간부 명단을 보면 제1대대장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1소대장 김보국(金保國), 제2소대장 전봉도(全奉道), 제3소대장 김기준(金基準),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1소대장 김전(金田), 제2소대장 이규성(李奎星), 제3소대장 신태봉(申泰鳳), 제3중대장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제1소대장 장세룡(張世龍), 제2소대장 김국보(金國輔), 제3소대장 신홍영(申洪永) 등이었다.

   1923년 2월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자 의군부에 가담하였다. 분열의 발단은 국내에서 온 양기탁(梁起鐸)과 전덕원(全德元)과의 불화와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문제나 인선, 조직 등의 표면적인 문제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1920년 이래로 계속되어 온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과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과의 이념투쟁이었던 것이다. 즉 광복 후에 수립될 민족국가의 형태와 이념문제를 놓고 민족독립운동가들 간의 대립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제5중대장 김명봉(金鳴鳳)과 부대장 조태빈은 통의부를 불신한다는 혐의로 피살되고 제5중대의 무기가 타 중대에 의하여 강제로 압수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덕원은 환인현(桓仁縣)에서 새로이 항일군단을 조직하여 통의부에서 분립을 선언하고 의군부를 조직하였던 것이다.

   채상덕은 이 의군부에서 총장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때 그와 함께 활동한 의군부의 간부들로는 군무부장 전덕원, 정무부장 김유성(金有聲),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사령장 오석영(吳錫泳), 부관 강규묵, 참모장 박대호(朴大浩), 대대장 박일초(朴一楚) 등이었다. 의군부는 조직된 이후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하고, 통의부를 적대시하며 통의부에서 관할하던 각 지방을 점령하고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채상덕은 1925년 참의부(參議府)의 고마령(古馬嶺) 참변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1925년 3월 16일에 만주 집안현(輯安縣) 고마령에서 독립군 간부 다수(29명)가 희생당한 참변이었다. 즉 당시 참의부에서는 이 지역 산림 계곡에서 국내의 적을 섬멸하기 위한 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는데, 이 때 평안북도 초산군(楚山郡) 적 경찰대에게 불의의 습격을 받아 군간부 등 29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희생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