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기념관] 아산 정주영 탄생 100년 기념시 보기
한국의 세 인물 큰 인물들의 유머 원시인, 아산과의 인터뷰
현대사의 3대 큰 인물
오늘 아산병원에 갔다가 검사 후 결과 진료까지 시간이 남아 아산 기념 전시실을 들렀다. 아산 정주영 회장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 중에 한 분이다. 살아 생전에 직접 만나뵙지는 못했지만 정 회장님이 문인들을 아낌없이 지원해주셨던 심상 해변시인학교 출신이기에 늘 감사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시를 쓴다. 정 회장님도 시적 감성이 풍부하신 분이었고, 회장님 스스로가 "나도 시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정 회장님은 시인 이전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훌륭한 인물이다. 정 회장님은 강원도 산골 흙수저로 태어나 대한민국 근대사의 큰 획을 그으신 박정희 대통령, 이병철 삼성회장과 더불어 현대그룹을 키워내신 현대사의 3대 큰 인물이시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기업가 정신과 강인한 추진력으로 한국 전쟁의 폐허를 딛고 현대 그룹을 키워 세계 시장에 진출하여 한국의 산업화 국제화를 이루며 한국 경제발전을 선도해 오신 인물이다.
정 회장님은 일화가 많으신 분이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화는 서상 방조제를 막으려 할 때 명문대학을 나온 임원들도 막지 못해 '안 된다'고 쩔쩔맬 때, "이봐! 해봤어?"라고 물으면서 폐 선박으로 막아내던 일화는 창의적 아이디어와 불굴의 도전정신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기억에 남는 일화는 영국에 가서 차관을 빌려올 때 허허벌판 갯벌만 사진 찍어 가서 영국 선박회사에 찾아가 "당심이 내 선박을 사준다고 약속하면, 내가 영국 정부에서 차관을 빌려다가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당신에게 팔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영국 정부로부터 차관을 빌려온 일화이다. 세째 일화는 1998년에 평화통일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으로 소 1001마리를 끌고 판문점을 넘어 평양에 다녀온 일화이다. 이로써 평화통일로 가는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산병원을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으로 꼽는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첫째 이유는 아버님께서 2005년에 다른 병원에서는 포기하여 돌아가시기 직전 아산병원에 오셔서 기도와 치료 끝에 살아나셔서 11년을 더 살다 2016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둘째 이유는 나를 진료해 주시는 박OO 의사 선생님은 "아산병원에만 들어오면 웬만해선 다 살아서 나갑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의사들 개개인의 자부심이 높은 병원이기 때문이다. 셋째 이유는 집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시설이 깨끗하고 편리한 구조로 되어 있고, 진료 예약과 치료과정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을 수차례 확인했다.
아산 정주영은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는 신념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는 뜻으로 의료사업, 사회복지사업, 연구개발지원사업 등에 큰 지원을 해오셨으며, 아산병원은 그런 취지로 '불우한 이웃들에게 질병을 끊겠다.'는 신념으로 서울 및 지방 각지에 세워진 병원이다. 여기에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아산의 인본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아산의 긍정적 사고 방식과 도전 정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아산 기념관 방문 후기>>
아산 정주영 회장은 문인들을 귀히 여겼다. 원시인이 등단하기 이전 1994년에 해변시인학교에 참가했다. 그 때 정 회장님께서 식사를 대접하고 후원금을 지원하는 등 먼 발치로 들으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았다.
정식으로 시인이 되고 시집 5권 정도 출간하다 보니 개인 서정시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새로운 비전의 돌파구로 인물시, 통일시를 쓰면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세 인물 중에 한 분인 정주영 회장님을 시로 쓰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시련을 딛고 거대한 성공을 일궈내는 도전과 개척정신은 대한민국 역사책에 길이 남을 인물이다. 늘 일찍 일어나 가슴 뛰는 삶을 살다가신 정 회장님의 삶처럼 나의 삶도 이미 저울 앞에 올려진지 오래되었다. 오늘 하루는 누구를, 어떤 시를 써야할 지 가슴 뛰는 삶을 살고 있다.
위 시(이봐 해봤어)를 아산병원 아산 기념관에 전시하여 많은 사람들이 정 회장님의 삶을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정리할 수 있는 갖게 했으면 하고 기념관 관리팀에게 요청하였으나 두 번의 전화로 확인하고 협의한 결과 "선생님과 같은 문인과 화가들의 요청이 간혹 있었으나 전시 공간을 추가하거나 바꿀 수 없으니 나중에 확장하거나 리모텔링할 때 고려해 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기사 현재 전시된 공간에 새로 추가하거나 변경하는 일은 참으로 귀찮은 일이다. 문학을 사랑하고 문인들을 귀히 대접했던 아산의 정신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 너도 나도 문인들이거나 화가들의 제안을 다 받아들이면 단초롬하고 깔끔한 전시실이 얼마나 지져분해지겠는가. 더구나 전시할 만한 실력이나 되고 요청했더라면 몰라도 뭐 수준도 없는 작품을 들이대며 요청하니 귀찮기만 할 것이다.
그래서 부끄런 마음에 더 요청하거나 문의도 못하고 원시인의 꿈을 좌절되고 말았다. 과연 정 회장님이라면 이 같은 대답을 했을까? 내가 아는 정 회장님이라면 비록 시나 그림이 부족하더라도 반가이 고맙게 받아 전시했을 것이다. 그 반가운 웃음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러면서 직원들에게 말씀하셨겠지. '이봐! 기념관 전시실이 좁고협소하니 3D 영상관과 체험학습실도 만들고 문인들의 작품과 화가들이의 그림도 맘껏 받아 전시해.'라고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고려해 보겠다는 직원에게 호통을 치셨겠지. "이봐! 해봤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말이 있다. 아산의 정신은 사진과 물건 몇 개로 남겨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들은 결국 쇠하고 사라지는 것들이다. 같은 시대를 공유한 사람들의 가슴에 남겨진 그의 눈빛과 따스한 가슴이 문학으로 예술로 승화되어 남겨 전해지는 것이다. 그동안 간혹 있었다는 문인들과 화가들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예술인들에게 실망과 상처를 주었던 관리팀의 말이 가슴을 찌른다.
나중에 원시인이 노벨문학상이라도 받으면 그 때엔 전시하겠노라고 연락이 올 것이다. 그래 문제는 내게 있었던 것이다. 내가 실력이 되면 앞다투어 연락이 올 것이다. 그 때를 기다리자.
참조하면 좋은 블로그 : http://blog.naver.com/meiling55/221043578849
https://www.youtube.com/watch?v=FGiNQndZ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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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과 세 여인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 에게 죽어서도 잊지 못할 세명의 여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인인 고 변중석 여사, 단골로 드나든 요정 마담, 평생 잊지 못하고 살았던 첫사랑의 여인인 고향 통천의 이장 집 딸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 최대 재벌이라 불렸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인생을 통틀어 이 세 여인만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고 한평생 맴 돌았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은 고 변중석 여사를 살아 있는 천사 라고 묘사했다.
고 변중석 여사는 종갓집의 큰며느리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매일 자정이 되어서 귀가하는 정주영 회장의 목욕물을 준비하고 다시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했다.
남편 얼굴을 볼 시간도 거의 없이 일복 속칭 몸빼을 입은 허름한 옷차림과 화장기 하나 없는 맨 얼굴로 날마다 본사 직원 3백여 명의 점심을 준비했다.
더욱이 자식 양육까지 도맡았다.
항상 미소를 잃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화내거나 싫은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변여사는 정주영 회장을 여보나 당신 대신 항상 회장님 이라고 불렀다.
회장의 어머니인 시어머니에 대해 물어도 자신보다 열 배는 부지런한 분이시다 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핏덩이를 자식 이라고 데리고 와 잘 키우라 라고 했을 때도 아무 싫은 내색 없이 자기 자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 정회장의 곁에서 평생 함께하며 그의 안위를 보살핀 조강지처 였다.
두 번째 여인은 정주영 회장이 태어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절체 절명의 위기 상황에 나타났다.
낙동강 고령교 복구 공사에 자신 만만하게 도전했던 정회장은 여름에 불어난 물과 부족한 장비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공사 진척도 보이지 않고 재정도 바닥난 상태였다.
인부들은 밀린 노임을 지급하라며 파업해 일은 거의 중단되었고 모든 돈을 쏟아 부었지만 사채 조달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정회장은 당시 사채놀이를 크게 하고 있던 요정 마담을 만나 자금을 부탁했다.
그녀는 더 이상 돈을 융통하기 어려웠던 정회장에게 필요할 때마다 자금을 지원했다.
정회장이 접대를 위해 자주 찾은 그 요정은 당시 제일가는 요정으로 손꼽히던 곳이었는데 마담은 천하일색에 여전 현재의 대학까지 나온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단골손님이었던 정회장은 소박하고 검소한 모습과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 씀씀이로 요정 내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말이 청산유수라는 마담도 정회장 앞에서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도 잘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녀가 돈을 보내줄 때마다 오인보 당시 경리책임자가 서울에 가서 받아오곤 했다.
어느 날 요정 마담이 정회장에게 한 번은 꼭 보고 싶다.
이번에는 직접 와 달라 서울에 꼭 들러 달라 준비를 좀 많이 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정회장은 볼 면목이 없다며 오인보를 보냈고 평소보다 세 배가 넘는 큰돈과 편지를 받았다.
정회장은 편지를 읽고 깜짝 놀랐다.
그 편지는 다름 아닌 유서였다.
꼭 성공하고 앞으로 더 큰일 많이 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정회장은 그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했던 정회장을 위해 요정 마담은 계속해서 큰 빚을 내 자금을 댔던 것이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안고 떠났다.
정회장은 마담의 장례식을 치르고 장지에 다녀오면서 오인보와 함께 울었다.
정회장은 그녀에게서 받은 마지막 돈으로 밀린 노임을 해결하고 일부 이자를 갚아 다시 일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를 코앞에 두고 자살까지 생각했던 정회장은 마담이 그를 대신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죽음은 생사의 기로에 섰던 정회장에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긍정적 으로 생각하면 해결할 수 있다라는 교훈을 뼛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게 했다.
정회장의 첫사랑은 오헨리의 소설 마지막 잎새의 나뭇잎 같이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통천 이장 집 딸이었던 정회장의 첫사랑은 통천에서도 제일가는 부잣집 딸이었다.
경성 지금의 서울에서 발행하는 동아일보를 유일하게 구독하는 집이었다.
정회장은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몸에 진이 다 빠진 후에도 이장 집에 가 동아일보를 받아 올 생각만 하면 20리 떨어진 길도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쏜살같이 달려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던 이광수의 흙을 보며 허숭 처럼 경성에 가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두 살 많은 이장 집 딸에게도 농군의 모습이 아닌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신문을 받을 때마다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천사같이 예쁜 그녀의 모습에 소년 정주영은 눈이 부시고 가슴이 울렁거려 얼굴 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이 빨개지고 화끈거려 땅바닥만 바라보았고 신문을 주는 손만 봐도 천사의 손보다 더 곱다고 생각했다.
흙과 이장 집 딸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던 그때 그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꿈을 이루겠다고 네 번의 가출 끝에 고향 통천을 떠난 정회장은 온갖 고생 끝에 광복 이후 현대건설 간판을 걸고 건설업과 자동차 수리업을 해 꽤 큰돈을 벌었다.
정회장은 항상 마음에 품고 살던 첫사랑이 보고 싶어 고향을 찾아가기로 했다.
하얀 신사복에 앞이 뾰족한 백구두를 신고 모자도 쓰고 좋은 시계도 찼다.
당시 아주 멋쟁이 같은 모습으로 친구 김영주와 함께 고향에 가 그녀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결혼해 아이를 둘이나 두고 있었다.
그녀는 신랑을 소개해주면서 밥을 차려주었지만 정회장은 여전히 그녀가 너무나 예뻐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가슴이 울렁거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식사를 끝냈다.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그 여자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 식사 대접을 한 번 더 받고 준비한 선물을 준 뒤 헤어졌지만 그 후 오랜 세월 첫사랑은 정회장의 가슴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67년이 흘렀고 17세 소년이었던 정주영은 84세의 한국 최대 재벌이 되었다.
그는 이익치 회장에게 자신이 북한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먼저는 국가와 민족의 통일 두 번째는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익치 전 회장에게 김정일 위원장에게 그 여인을 찾아달라는 부탁을 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에서 첫사랑을 데려와 매일 아침 손잡고 걸어서 출근하고 싶다는 소망을 내비쳤다.
정회장은 서울 가회동에 첫사랑과 함께 살 집을 마련하라고 이익치 회장에게 지시했다.
이회장은 가회동에 매물로 나온 전 화신산업 박흥식 사장의 집을 70억원에 매입했다.
가회동 2층에 침실을 마련했고 그날부터 정회장은 가회동에서 기거했다.
정회장에게 첫사랑에 대한 희망은 곧 삶에 대한 희망이었다.
2000년 초 자식들의 재산 싸움을 보면서 정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정씨 일가의 경영 일선 퇴진과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을 선언했지만 자식들은 이를 거부했다.
정회장은 더욱 큰 실의에 빠졌고 이것은 건강 문제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희망이 남아 있었기에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을 성공시키며 김정일 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6월28일 판문점을 지나 평양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정회장은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첫사랑 여인이 2년 전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로 북한의 관계 당국이 동원되어 통천 이장 집 딸을 수개월간 찾았다.
북측은 정회장에게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된 통천을 떠난 그녀가 청진에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 그 가족을 평양에 데려다 놓았으니 원하면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을 전달했다.
정회장은 북한의 아태평화위 송호경 부위원장에게 한 시간여 동안 그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정회장은 2년 전에만 알았다면 아산병원에 데려가서 고칠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가 좀 늦었다라며 아쉬워했다.
그 후 정회장은 다시 북한을 찾지 않았다.
마지막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을 본 정주영 회장은 몇 달 후인 2001년 3월 눈을 감았다.
그의 첫사랑은 평생을 그와 함께 했고 결국 그를 데려갔다.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자네도 빈손 나 또한 빈손으로 갈텐데
있다고 더 오래 살고 없다고 더 적게 사는 인생도 아닌 것을 ~
(카톡에서 받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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