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화여중] 에듀프레스 : http://www.edupress.kr/news/articleView.html?idxno=11097
소장한 책 아이들에게 분양하기
진로실 책장에 꽂혀 1년 동안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은 책들을 아이들에게 분양하기로 했다. 책을 분양하기 위해 책들을 어루만지니 '언제 이런 책이 여기 있었지?', '아! 이 책이 여기 있었구나!', '이건 무슨 책이지', '이건 좀 아까운데..' 연실 독백을 한다. 남 주자니 아까운 책들도 여럿 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읽지는 않았다.
나중에 봐야지 하면서 꽂아두는 책이거나 사인해서 선물 받은 책들이 많다. 이런 책을 냈다고 보내오는 책들이 많다. 남모르는 작가들의 책도 일일이 읽어 독서평론을 써서 인터넷 신문에 올려주면 그리 반가워하는데 그런 책들을 어찌 버리겠는가. 더구나 이미 알고 지내는 분들의 책은 더 버리기가 아깝다. 그래서 모아둔 책들이 쌓여간다. 옆에서 책을 버린다면 얼른 받아 꽂아둔 책들도 있다. 집에 서재는 서재대로 학교 진로실은 진로실대로 책 풍년이다.
진로실은 아이들이 인생을 상담하러 오는 아이들보다 '선생님 먹을 것 없어요?'. '선생님 목마른데 물 없어요?', '선생님! 당 떨어졌어요!' 이렇게 먹을 것 먹으러 오는 아이들이 더 많다. '애들아! 지금 점심시간인데 밥 안 먹었어?'라고 물으면 '밥은 먹었는데 디저트는 안 먹었어요. 후식!'이라고 말한다. 진로교재 넣어두는 진열장에 아이들 1회용 컵이 즐비하다. 한 번 먹고 버리기엔 아까워서 이름을 쓰고 넣어두니 진열장에 꽉 찼다. 사실 여름철에는 하루에 50 내지100여 개의 컵을 감당할 수가 없다. 생수를 사서 보급하는 사적 비용도 만만찮다.
사실 아이들에겐 '아리수'를 먹을 수 있게 층마다 설치해 놨는데 선생님들도 아리수 잘 안 먹어서 각자 생수를 사먹듯, 3층에 별도 교무실에서는 선생님들이 돈을 각출해서 생수를 사먹는다. 그러니 아이들도 급할 때는 아리수를 먹지만 제일 만만한(?) 진로실에 와서 물을 얻어먹는다. 물을 사먹느라 생수병이 보이는데 수십 병을 쌓아놓고 아이들이 달라는데 매정하게 '안돼!'라고 못하니 줄 수밖에 없다. 생수를 주려니 종이컵이 필요하고 종이컵도 박스로 산다.
지난 3년 간 코로나로 진로실에서 물이나 음식을 줄 수 없어서 좀 한가했는데 코로나 풀리니 쉬는 시간마다 점심시간마다 아이들이 즐겁게 달려온다. 그러니 초콜릿, 사탕, 오 예스, 초코파이 등 간식을 준비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 사탕은 이도 썩게 하고 인내심도 떨어지게 하니 사탕은 거의 안 준다. 집에서 식탁에 즐비한 간식들을 보면 덥석덥석 학교로 챙겨온다. 어쩌다 아내가 봐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챙겨준다.
아이들에게 책을 골라 가라고 했더니 잘 안 골라 간다. 어떤 내용인지 몰라고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가 싶다. 그래서 진로시간 수업을 하면서 "이 책은 어느 작가의 책이고 여기 사인이 있어. 원시인이 시인이 되게 하신 수녀 시인의 시집이야. 이 책을 읽으면 너희도 시인이 될지 몰라.", "이 책은 화내거나 큰소리치지 않고 '이기는 말의 기술'이라는 책이야. 너희들 말할 때 먼저 화를 내면 지는 거야. 인내하며 논리적으로 말하는 기술이 있지. 이 책에서 배워!"라고 하면 서로서로 손을 든다. 손 드는 학생이 많을 땐 '가위 바위 보'로 승부를 내서 갖는다. 책 한 권이 영광이 된다.
이렇듯 누군가가 나의 소장한 책을 되받아 열심히 읽어준다면 그 아이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원시인의 기쁨이 된다. 물론 내게 준 저자들도 기뻐할 것이라 믿는다. 원시인 사인이 들어간 책을 받고 기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가 더 기쁘다.
"애들아! 이 사인들은 10년 후에 가져오면 10만원 줄게!" "원시인쌤! 10년까지 살아 있을 수 있어요?" "글쎄, 그 전에 타임머신 다 고쳐서 원시의 세계로 돌아갈지 모르지." "그럼 우린 누구한테 돈을 받죠?" "내가 돌아가면 못 받지." "엥! 그런 게 어딨어요!"
어떤 책은 저자의 사인과 원시인의 사인이 겹친다. '너는 언제나 무대에서 멋져. 네가 펼쳐가는 무대가 원시인은 궁금해질 거야. 멋지게 힘차게 '더블 클릭'하길...'., 'oo아! oo여중으로 전학 온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단다. 멋진 삶을 그려서 성공하렴. 너의 성공을 위해 원시인은 살구나무 아래에서 기도할게..',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재미있게 열심히 살다가 암에 걸려 죽는다면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까? '마지막 강의'를 하겠지? 랜디 포시의 마지막 강의 한 번 읽어 봐!'
내겐 책장 속에서 한동안 잊혀진 책들을 아이들이 받아들고 기뻐하는 모습은 보지 않고는 글로 그려내기 어렵다. '누군가에게 하찮은 물건도 누군가에겐 보석이 된다. 누군가에게 하찮은 사람도 누군가에겐 귀인이 된다. 누군가에게 하찮은 시간도 누군가에겐 황금시간이 된다.' 책을 분양하면서 깨달은 삶의 진리이다. 책장에서 죽었던 책들이 날개를 달고 아이들 품속으로 날아간다. 부활이다.
이영철 소설가의 "더블 클릭" - 도서출판 '청어'의 대표님의 책을 분양하다..
이해인 수녀님의 "꽃은 흩어지고 그리움은 모으고"를 분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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