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세상/◈글모음◈

그림 그리기(시-신호현)

원 시 인 2010. 3. 18. 05:38

 

 서울교육 소식지 전면에 실렸던 詩 그림그리기

 

 

 

 

그림 그리기

 

 

 

아침 출근길에

큰 붓을 하나 주웠다

 

밤새 화가 지망생이

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려다

지쳐 떨어뜨린 붓 하나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하나

 

먼저 투명 물감 꺼내

공해로 찌든 하늘을 칠했다

햇빛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지하철 찡그린 사람들에게

핑크빛 미소를 그렸다

모두가 반갑게 인사한다

 

교무실에선 선생님들에게

초록빛 행복을 듬뿍 칠했다

선생님들이 새싹처럼 피어올랐다

 

교실에서 아이들에겐

하양색 순수의 도화지에

노랑색 희망과

빨강색 열정과

파랑색 겸손을

마구마구 칠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6시 50분에 출근을 시작 7시에 지하철을 탄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재촉하는 발걸음엔 지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부산하다. 그래도 마음만은 언제나 설렌다. 또 어떤 하루가 기다릴까. 고민 없는 시작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교직은 다름 어떤 직업보다도 고민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한다.

   그런 발걸음 속에 길바닥에 누워 새로운 인연으로 만난 커다란 붓 하나. 어느 화가 지망생이 밤늦게 귀가하다가 지친 발걸음에 떨어뜨렸나보다. 세상을 다 그릴 듯이 정말 큰 붓이었다. 난 공해로 찌든 하늘에 투명 그림을 그렸다. 하늘이 맑아졌다. 공기가 신선해졌다. 햇빛이 보석처럼 빛났다.

   지하철에 사람들은 표정이 너무 딱딱하다. 어제 보고 그저께 보았던 사람도 서로 인사도 없다. 난 지하철에서 붓을 꺼내 핑크빛 물감을 찍어 미소를 그렸다.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서로 자리를 양보한다. 걸인 한 사람 웃으며 지하철을 나갔다.

   교무실에 오니 선생님들 아침도 못 먹었단다. 하루 일과 앞에서 주눅이 들었는지 어두운 얼굴빛이 감돌았다. 난 행복의 초록 물감을 듬뿍 칠했다. 선생님들의 얼굴이 밝아지더니 새싹처럼 피어올랐다. 빨강색 열정을 칠해 드릴 걸 그랬나?

   교실에 들어가니 아이들 아침부터 덥다고 쓰러져 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건 선풍기 4대. 사람 모인 곳에 에어컨 없는 곳이 교실뿐이라는 것을 학부모님들은 아실런지. 찡그린 아이들에겐 희망이 안 보였다. 난 먼저 선생님들께 못 칠한 빨강물감을 칠했다. 파랑물감의 겸손을 칠했다. 아이들이 웃으며 인사를 한다. 순수를 잃어버린 아이들에겐 하양물감을 쏟았다. 순수한 아이들이 더없이 예뻐 보였다. 다시 노랑물감을 마구마구 뿌렸다.

   나는 세상을 바꿔주는 요술봉 같은 붓을 가방에 넣었다. 가방에 넣고 다니다 보면 또 꺼내 그림을 그릴 일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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