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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스승의 날에 되새기는 '촌뜨기 선생님'의 바람

원 시 인 2010. 5. 12. 20:50

[교단에서]스승의 날에 되새기는 '촌뜨기 선생님'의 바람

                                          한국교직원신문  2010-05-07

    내가 서울에 처음 발을 디뎠던 때는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서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과 피부색이 하얗고 깨끗해 보이는 사람들이 사는 곳, 부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새롭고 신기한 물건들이 많은 곳, 자동차가 있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란 생각.

 서울에 처음 와서 잠을 잔 곳은 지금 내가 서울에 근무하는 학교 밑 경복궁옆 효자동이었다. 서울의 효자들만 모여서 사는 곳인가 했던 효자동에서 인왕산을 바라보았고 남산에 올라 한강을 내려다 보기도 했다. 그 때에는 지하철도 없었고 버스만 타고 다녔다.

 고등학생이 되어 공부를 할 때였다. 그 당시 시골 학생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서 부모님의 바쁜 농삿일을 도와 드리고 나면 여름엔 8~9시가 되고, 씻고 밥 먹고 나면 10시쯤 된다. 나름대로 공부한다고 밥상을 펴놓고 앉아 숙제를 해보지만 책 속에 숨었던 피곤이 금방 몰려와 잠의 나라로 데려갔다.

 피곤해서 숙제를 못 해간 다음 날이면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신 선생님들은 무서운 얼굴로 회초리를 들고는 손바닥을 때리시며 "그렇게 해서 서울 학생을 이기겠나! 서울 학생들은 일할 것도 놀 곳도 없어 밤낮 공부만 한다. 서울 애들 얼굴 봤냐? 얼굴이 하얀 게 꼭 공부벌레 같지 않느냐!" 하시며 회초리에 힘을 주시곤 하셨다.

 그 때 그 선생님의 말씀이 대입 공부를 하며 졸음을 이기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서울 친척이 내려오면 얼굴과 피부가 하얀 것을 보며 공부벌레라 생각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그들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때 내 꿈은 이미 정해졌었다. 집에서 키우던 누우런 황소 '슬비'를 푸른 들녘으로 끌고가 자유로이 풀을 뜯기며 바라보는 즐거움! 그 때 황소는 가난했던 우리 집의 미래였고 희망이었듯이 나의 꿈은 미래의 희망이며 우리나라의 기둥인 아이들에게 '언어의 풀'을 뜯기는 것이었다.

 지금은 어릴 적 그 꿈을 키워 서울의 한 여중에서 교편(敎鞭)을 잡고 있다. 우연이었을까? 중2 때 서울에서의 첫 밤을 보내며 바라보았던 인왕산 기슭.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사촌 누나가 다니던 그 여중. 당시는 육영수 여사가 졸업한 학교라고 그리도 유명했던 학교에 오게 된 인연도 그렇고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삶이란 나름대로의 카테고리(範疇)나 숙명이 존재하는 듯했다.

 이제는 어언 교직생활 20여년에 수천 명의 제자들을 서울 아니 세계의 구석구석에 심어 놓았다. 학생들과 함께 보내온 세월이 함께 보낼 세월보다 짧다. 매 순간순간이 소중한 시간들 속에서 '인생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시작이요, 새로운 종말이다'. 어제의 나의 모습과 꿈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의 나의 모습이 내일의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요즘 아이들 도덕책에는 '본래적 가치(本來的 價値)'라는 말이 있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 된 후 얼마나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라가 잘 되려면 군군(君君), 신신(臣臣), 민민(民民)이라 했듯이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교사는 교사답게 각자가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나의 적성과 재능을 살려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그 수치를 잴 수 없지만 항상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리라.

 서울이 거대화되고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그 곳에 사는 우리는 갈수록 '인간의 따뜻한 정'을 잃어가는 것이 안타깝다. 서울의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런 서울의 아이들에게 시골에서 자라면서 배운 따뜻한 정과 사랑을 그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싶다. 그리하여 시골 출신의 선생님이 서울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다행(多幸)인가를 보여주고 싶다. 

 

 신호현 서울 배화여중 교사

한국교직원공제회 신문(2010.5.7) http://www.ktcunews.com/sub06/article.jsp?cid=11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