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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엑스 미술전시]KIAF 2015 / ART SEOUL에 다녀오다.

원 시 인 2015. 10. 11. 18:46

[코엑스 미술전시]

 

입체를 절규하는 평면의 몸부림

 

                                                              - KIAF 2015 / ART SEOUL

 

    [2015 한국국제아트페어] KIAF 2015 / ART SEOUL은 2015년 10월 07일(수)부터10월 11일(일)까지 삼성 COEX에서 열었다. 한국국제아트페어에서 주관하고 세계11개국 180여 갤러리에서 참가하는 갤러리전은 국내외 내로라는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 및 판매까지 하는 행사이다. 

    내가 방문한 날은 11일이라서 마지막 날 5시에 행사 종료됨으로 마지막 입장이 허락되는 4시쯤에 이인경 작가의 안내로 120번 부스로 찾아 갔다. 좀더 일찍 들어갔더라면 아쉬움 속에 마지막 행사일이라 분주한 발걸음들이 마음을 초조하게 했다. 이인경 작가는 지난 2013년에 잠실 롯데월드 갤러리에서 "일상의 축복-이인경 展"(http://blog.naver.com/lottejamshil/220423148719)을 개최하여 이미 대중에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당시 전시회에서는 성경 속에 인물인 '요나'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여 고래와 인간의 친근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심어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더구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려던 요나를 바다에 빠뜨려 고래 속에 들어가게 함으로서 다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신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어 마치 동화 속에 한 장면을 보듯이 친근감을 주었다.

    난 개인적으로 그래를 보면 세월호의 아픔이 떠올라 침몰 당일에도 뒤집어진 세월호를 보면서 단원고 아이들이 빨리 구조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요나의 아이들"(http://blog.daum.net/phshh/15782518)이라는 시를 썼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뱃속에서 토해내게 하신 것처럼 그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아이들을 꺼내 주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시를 썼다. 그러나 요나처럼 토해내지 않고 침몰하는 세월호를 어찌나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는지 지금도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이다. 

     난 사실 시를 쓰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래서 그림을 평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여기 초대 전시된 작품들은 국내외 정상급 작가들의 작품들이다. 이런 전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축복이고 영광이다. 그런데 감히 감상을 쓴 다는 것은 그분의 숭고한 작품에 티를 묻히는 격이지만 어찌 문외한이라고 감동이 없겠으며 감상이 없겠는가. 그래서 몇 작품 느낌을 적어 볼까 한다.   

 

 

    짧은 1시간 동안 180부스를 돌아다닌 것은 불가능이다. 빠른 걸음 속에 비춰지는 그림들에서 확연히 떠오르는 모습은 그림이 평면에서 구현되는 예술인데 그 평면이 얼마나 입체를 선망하고 있는지 마치 입체를 향한 절규로 다가왔다. "입체를 절규하는 평면의 몸부림"이라 제목을 붙여 보았다. 그리고 많은 작품들 중에서 제목과 부합하는 작품들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작품만 찍었고 찍은 것을 다 올리는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몇 작품만 선정해서 올렸다.

    120번 부스를 떠나면서 처음에 눈에 들어온 것이 이 작품이다. 몇 번 부스에 있었는지 누구의 작품이고, 무슨 제목으로 전시된 작품인지 모른다. 검은 배경 속에 사과의 그림이 사진처럼 선명하다.(어쩜 사진인지도 모르겠다.) 싱그러운 느낌을 나타내려 물방울이 묻어 있는 사과를 그렸는데 물방울 하나하나가 입체감이 살아 있다. 사과 꼭지의 모습도 리얼하다. 자세히 들여봐도 평면 위에 그린 작품이다. 가까이서 봐도 입체감이 선연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눈에 확 들어온 것은 물방울보다, 사과 꼭지보다, 물밖으로 표현된 부분이다. 그 부분은 진짜 사과를 잘라다 붙인듯 진짜 입체다. 아무리 봐도 사과가 물에 잠겨 윗 부분이 떠 있는 듯한 입체감을 준다. 물론 이렇게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사과가 물에 잠겨 있는 부분에 맺힌 물방울이다. 언뜻 봐서는 물 위에 떠 있는 사과인데 물 속에 잠긴 부분에 물방울이 이해되지 않아 가을 고추잠자리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 작품은 상당히 큰 작품인데 폰속에서는 같은 크기로 재구성된다. 일본 작가의 그림이라는데 그림 속에 입체감이 확 떠올랐다. 도시 건물 사이를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소녀가 있는가 하면 소형 로켓을 등에 지고 날아 다닌다. 고층 난간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학교에서 위험하다고 유리창 청소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이 그림 속에서는 자연스럽니다. 그냥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만화 같은 이야기다. 

    만화이지만 사실 같이 그림을 자세히 그렸다. 리얼과 픽션 사이에서 감동을 주는 그림이다. 교육적으로는 불안한 느낌을 주지만 상상 속에서는 무한정 지유롭다. 이런 세상이 오겠지. 비행기도 만화가들이 먼저 그렸고 과학자들이 현실에서 발명해냈듯이 이렇게 건물 위를 자유롭게 나는 세상이 올 것이다.옆 건물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일은 아주 우스꽝스런 일이 될 것이다.  

     이 그림은 내가 예전부터 관심 있게 보는 그림의 형식이다.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그려 입체감을 주는 것이다. 물감이 낭비되는 일이라 가난하게 살던 옛 시절을 바라보면 이처럼 낭비되는 일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평면의 그림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나에게는 와닿는 그림이다. 투박한 질감도 있어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따뜻한 느낌으로 오래 보아도 정겹다. 부분만 찍어 작품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것일 아닐까 송구했지만 올렸다.

     이 작품은 눈에 확들어와 다가가 사진을 찍는데 다행이 옆에 작가가 있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작가는 조금 전에 뉴욕에서 도착한 이종왕(JONGWANG, LEE)님의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잔인하다', '무섭다'라는 느낌을 가졌다. 그런데 옆에 있던 어떤 여자 손님은 '야하다'라고 말했다. 나는 '야하다'는 말에 '뭐가 야해요?'라고 물었는데 그녀는 웃으며 사라졌다. '야하다?' 나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보기에는 눈이 들어왔다. 그리고 창자 같은 내장의 모습. 발가락인지 손가락인지 찢어진 사지가 보이는 듯했고, 핏줄이 보였다. 죽음을 상징하듯 검은 색들이 질서 없이 펼쳐져 여기저기 썩어들어가는 느낌을 일게 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인체의 사지를 뜯어 늘어놓은 것처럼 보였기에 '잔인하다', '무섭다'라는 느낌을 가진 것이다. 어렸을 때 보았던 돼지 잡을 때 배를 가르면 돼지의 창자가 드러나듯 찢어진 육체를 표현했지만 거기에는 자연과 꽃의 이미지를 겹쳐 그림으로서 육체와 정신,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꿈꾸는 그림으로 보였다. 

     작가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인데 동생이 OO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이라신다. '어라! 거기에는 내 친구가 교무부장으로 있는데...?' 난 즉각 카톡으로 친구에게 문자를 넣었다. 친구는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작가와 사진을 찍었다. 비록 긴 시간의 대화는 아니었지만 나는 사물의 분리를 보았는데 작가는 사물의 통합으로 그렸다 한다. 인체의 통합, 자연과의 통합, 동서양의 통합... 그리고 본능과 이성의 통합(여기서 '야하다'라는 표현이 나왔나보다.) 작품을 통해서 세상의 문제를 인식하고 통합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한 것이다. 비슷한 느낌의 몇 작품이 더 있었지만 그 작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니 대개 같은 뜻을 품고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입체감을 주기 위해 한지로 작품을 제작했다. 1980년대 무악동 언덕을 연상케 하는 그림이다. 뭐 무악동만 이랬을까? 재개발되기 전에 서울의 언덕들이 모두 이와 같았을 것이다. 시멘트 벽돌에 스레트집. 어쩌다 기와집. 집들은 오래되어 비가 새고 벽은 삭아서 허물어져 갔다.재개발 지역이 지정되면 축복인지 저주인지. 그나마 돈 있는 사람들은 재개발 부담금을 낼 수 있어 새 아파트로 이사 가니 좋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이 허름한 집마져 쫓겨났다.

    형광등도 아닌 60와트 백열전구가 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입체감 있게 잘 묘사했다. 원근감과 질감이 있어 가난하지만 아늑한 모습이 느껴진다. 그렇겠지 평면의 캔버스에 단지 연필과 붓만으로는 살짝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 옛날에 정겨운 모습들을 표현하기 힘들었겠지.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면 이모, 고모가 있고 삼춘이 함께 사는, 형제와 자매가 방마다 서넛 씩 뒹글어 잠자는 모습. '가난했던 추억 속에 행복'이 묻어나올 것이다.    

    이 그림은 왜 내 발목을 잡았을까? 넘치도록 채워주시던 할머니의 사랑! 투박한 사기 그릇에 안에 들어 있는 밥보다 더 많이 얹어 주시던 할머니. "많이 먹어라!" 하이얀 밥그릇엔 아마도 선분홍 할머니의 사랑이 스며 있었을 것이다. 아니 더 넘쳐 흘렀겠지. 뭐, 사랑이라면 할머니만 그랬으랴. 윗사람들이 아랫사람을 향해 주는 사랑은 모두 흘러 넘쳤다. 당시에는 '감사하다' 표현도 제대로 못했는데 돌이킬 수 없는 지금에야 가슴 절절이 끓어나는 그리움 덩어리. 그 덩어리가 발목을 잡아 사진을 찍게 했다.

     이 작품은 '입체를 절규하는 평면의 몸부림'의 근접하는 작품이다. 말 그대로 평면이다. 그런데 어찌나 입체화를 잘 표현했는지. 필기도구를 쏟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아도 입체인듯 보이나 사실은 평면이다. 내가 이제는 노안이 되었나보다. 입체와 평면도 구분을 못하는 것을 보니... 하기야 요즘에는 가짜로 만든 꽃이 너무 진짜 같고, 가짜 가수가 진짜처럼 노래를 부르며 다닌다. 

     플라톤는 그래서 '예술추방론'을 주장했다. '신의 세계(완전한 세계)'를 목수가 '현실에서 의자(현실의 세계)'로 만들었다면, 예술가들은 목수가 만든 현실의 세계를 보고 '예술작품(그림)'을 만들었기에 진실이 아닌 가짜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짜인 예술은 추방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위 그림을 보면 현실에서 구현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추구했기에 어쩌면 '신의 세계'에 더 접근한 것이 예술 작품이다. 그래서 예술은 추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존중받아야 한다. 가짜에도 진실은 있는 것이다.     

    이그림은 언뜻 보기에 피카소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선이 굵기도 하고 얼굴의 부분마다 색깔이 다르게 칠했다. 물론 피카소처럼 얼굴에 다양한 상상을 가하진 않았다. 하지만 선과 색의 적절한 조화로 역시 입체로의 소망을 담아내고 있다. 작가는 입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지 모르지만 문외한의 눈에는 그리 보였다. 굵은 선과 색의 조화로 원근감을 조정했고, 화장을 하듯 선명한 색을 통해 시선을 끌고 있었다.

     이것은 사진이다. 이렇게 말하는 믿어줄 것처럼 리얼하게 그린 작품이다. 저 높은 고원의 눈쌓인 설산(雪山)이 사실처럼 느껴지도록 그렸다. 물론 여기도 입체를 절규하는 평면의 몸부림이 절실히 담겨 있다. 본래는 더 큰 작품인데 부분만 찍었다. '인간의 붓끝'과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동일한 '움직임'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듯 작가도 이 그림을 그리고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