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인세상/◈글모음◈

포도나무의 추억

원 시 인 2010. 3. 21. 06:48

   지난 4월 20일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따사로운 봄햇살이 귓볼을 간질러 기분이 좋았다. 얼마전까지만도 삭막하던 세상이었는데 바쁜 세월에 여울에서 고개를 돌려보니 세상을 푸르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노래라도 부를듯이 춤이라도 추듯이 골목길을 돌아서는데 보도에 늘어선 포도나무와 마주쳤다.
   포도나무는 뿌리가 뽑혀 비닐 봉지 속에 담겨있었는데 봄햇살에 고개를 내민 잎들이 고사리 손보다 앙징맞았다. 50미터를 그냥 지나치다 그 끈끈한 시선에 끌리어 다시 돌아가 포도나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서 살다 왔니? 밑둥이 제법 굵직하니 십수 년은 살았구나. 어쩌다 서울에 왔니? 너도 네 꿈을 서울에서 펴고 싶었구나.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구나.'
   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자 장삿속에 바른 주인 아주머니는 포도나무의 대답을 대신해 주었다. '강화도 포도밭에서 왔어요. 시아버지가 포도 농장을 하시는데 집을 짓게 되어서 가져왔어요. 10년이 더 됐는데 열매가 잘 열어요.' 얼마예요?' '3만 5천원이예요. 비싸면 안에도 몇 그루 있어요. 2만 2천원 짜리...' 마음은 밖에 두고 안에 대충 들여다보니 역시 볼품이 없었다.'이걸루 주세요.'정가제도 아닌데 값을 깍을 생각도 없이 주머니 속에 돈을 건넸다.
   '우와! 이 나무가 제일 좋은 것인데 역시 포도나무 보실 줄 아시네요. 집에 십으시고 물을 많이 주세요. 껍질은 벗겨주고 올 열매는 맺히자마자 따주세요. 그럼 내년부터 두 배 크기로 열립니다.  물만 많이 주면 잘 자랍니다. 잘 선택하셨어요.'
   난 포도나무를 들고 걸어갈 수 없어서 마치 손님을 초대하듯 택시를 불렀다. 포도농장에서 가슴을 쫙 펴고 잘 자란 탓에 뒷좌석도 좁았으나 기사아저씨는  너그러운 웃음으로 태워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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