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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숭례문이여
겨울이 물러가다 되돌아선
검은 태풍이 일던 그 곳은
서울의 한복판이었다.
돌 제단에 누워
이 생에서 마지막 불꽃을 받아
하늘로 오르는 거룩한 승천식
그리 매섭도록 무관심하던
차가운 눈길 속에서 마침내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육백년 도읍을 자랑하며
멋드러진 자태로 뽐내던 기상
민족의 한을 우려 안은 당신은
어린 백성들의 어머니였다.
인간의 육십 평생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못 다할
당신과의 모질고 질긴 인연은
하루 아침 허망한 통곡이었나.
모진 바람 맞고 서서
아프면 아프다 말하지 않고
외로우면 외롭다 더욱 침묵하던
당신은 그렇게 살아왔구나.
오늘 당신은
미 친 낭도의 칼에 스러진
당당한 국모의 자태였으며
삼전도 굴욕을 당한
인조대왕의 눈물이었다.
역사는 물처럼 흘러
망각의 강을 건너겠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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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좋은 아빠되기
3월, 학교에서 학년초 바쁜 시간에 부장회의를 하는데 맞벌이 교사인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의중 메시지를 보내고 수신을 못했다. 회의가 끝나고 전화를 거니 이번에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친구에게 맞아 이마에 혹이 났다는 것이다.
자세히 들어보니 점심시간에 줄을 서려고 가는데 그 친구가 다리를 복도에 걸치고 못 지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그 친구가 초등학교 때 ‘짱’이어서 피해 지나갔는데 아들녀석은 발을 밀치며 그냥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너 어느 학교 출신이냐?’며 손가락으로 배를 쿡쿡 찌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손을 막으니까 다짜고짜 목을 움켜잡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뿌리치니 안경을 벗게 하고 얼굴을 마구 때렸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무릎으로 이마를 까서 아들녀석이 넘어졌다는 것이다.
아내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내 판단을 기다렸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화가 났다. 그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좋은 아빠가 되는지 생각했다.
아들녀석이 6학년 때 통학버스에서 1학년 아이를 괴롭히는 4학년 아이를 ‘자기 자리에 앉으라.’며 주의를 줬는데 그 아이가 말을 안 듣고 계속 그러기에 때렸다가 그 아이의 아빠가 아이들만 있는 집 안에 쳐들어와 아들녀석을 때리고 머리를 벽에 부딪혀 뒤통수에 혹이 났던 사건이 생각났다. 그러고는 아내와 아빠인 내게 전화를 걸어 막 욕을 하고 밤 두세 시에도 전화를 걸던 그 아빠. 잠을 잘 수가 없었단다.
나도 달려가 아들을 때린 그 아이 집에 찾아가 그 아이를 때려주고 싶었다. 그 때 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던 아빠로서의 부끄러움과 나름 교사이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을 못하고 그저 학교의 일처리만 기다렸던 소심함이랄까. 한 편으로는 아이들뿐이 없는 집안에 쳐들어와 아들을 때린 그 아빠의 범죄적 행동마저도 부러웠었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사실을 말씀드리라고 했다. 다행이 담임선생님은 1학년 9명의 담임 중 유일한 남자 선생님이시고 체육선생님이시다. 입학식 때 뵌 모습으로는 교직 3년차로 의욕과 열정이 넘치시는 분이었다. 그래서 같은 선생님으로서 마구 행동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담임선생님의 처분만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같은 선배교사에게 물으니 그 선생님도 아들이 외국에서 1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바람에 1년 아이들과 학교를 다녔는데 그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괴롭혀 싸우다보니 무척 힘들었단다. 그런데 담임은 1년 기간제 여교사였는데 담임 경험도 없는데다 남자 아이들을 잘 다루지 못해 학교를 그만 두고 대안학교로 보내려 했었단다.
새 학년을 맞아 교복 공동구매의 어설픈 일처리로 아들을 비롯하여 미처 교복을 구입하지 못한 아이들은 아직도 사복을 입고 있어 더욱 눈에 띄는데 담임선생님의 명쾌하고 확고한 일처리로 무사히 넘어갈지 지켜볼 일이다. 밤새 잠은 안 오고 오랜만에 아들을 끌어안고 기도하면서 아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심한 교사의 좋은 아빠되기를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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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8번 글의 답변에 대한 반론 제기
담당부서 지역개발국 건설과 답변일자 2010-03-05 20:59:30
작성자 김덕호 전화번호 031-644-2436 이메일
이천시 도로관리 업무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귀하께서 요구하신 고담동 횡단보도 지점에 과속방지턱 설치 건의 건은 현장확인결과 국지도 70호선으로 간선도로또는 보조간선도로 등 이동성의 기능을 갖는 도로에서는 과속방지턱은 설치가 불가함을 알려드리며,
우리시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하여 고담동 및 장록동 일원에 보도를 설치하였으며, 지속적으로 보행자의 안전을 위한 노력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우리시 도로관리 업무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신데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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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조부서] : 지역개발국 교통행정과 [답변일자] : 2010-03-03 11:25:01
[작성자] : 이철연 [전화번호] : 644-2382 [이메일] :
[답변내용] :
교통사고예방을 위해 관심을 가져주신 신호연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또한 교통사고와 불편을 끼친점 조송하게 생각합니다.
귀하께서 요구하신 고담동 횡단보도에 과속카메라 설치와 관련 이천경찰서와 협의한결과, 고담동에서 수백미터 지점인 장록동에 기 과속카메라가 설치되어 잇어 경찰청규정상 설치가 불가능함을 알려드립니다.
아울러 우리 교통행정과는 교통사고예방을 위해 이천경찰서와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가능한 방법을 모색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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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6118번 글을 썼던 신호현입니다.
여러 민원을 듣고 처리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힘들어도 나름 정치의 보람을 느끼시리라 사료됩니다.
6118번 민원에 대한 답변을 보고 아래와 같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1. [담당부서인 지역개발국 건설과 김덕호 선생님의 답변에 대한 반론]
담당부서인 지역개발국 건설과 김덕호 선생님께서는 "고담동 횡단보도 지점에 과속방지턱 설치 건의 건은 현장확인결과 국지도 70호선으로 간선도로또는 보조간선도로 등 이동성의 기능을 갖는 도로에서는 과속방지턱은 설치가 불가함을 알려드리며"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같은 국지도 70번 도로인 백사면 모전리에서 현방리간 도로에 적어도 4~5개의 과속 방지턱이 설치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같은 도로에 어느 지역은 안되고 어느 지역은 이미 설치되어 사고량을 줄이는 것은 대답하신 결과에 맞지 않다고 사료됩니다.
더구나 옆 동네인 단월동은 외곽도로를 설치하여 속도를 낼 수 있게 하고, 또다른 장록동에는 과속방지 카메라를 설치하여 과속을 못하도록 하니 고담동에는 과속방지턱 2개(양쪽 입구) 정도 설치해 달라는 민원을 간과하시면 또다시 사고로 죽음을 불러올 것이 명약관화한 사실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제가 글을 올리고 며칠 후 다시 그 지역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명을 지키는 일에 시각을 다투는데 "안 된다, 불가하다"고만 하시니 답답합니다.
2. [협조부서인 지역개발국 교통행정과 이철연 선생님의 답변에 대한 반론]
협조부서인 지역개발국 교통행정과 이철연 선생님의 "고담동 횡단보도에 과속카메라 설치와 관련 이천경찰서와 협의한결과, 고담동에서 수백미터 지점인 장록동에 기 과속카메라가 설치되어 잇어 경찰청규정상 설치가 불가능함"을 알려오셨습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도 있나요? 마음 먹으면 우리 인간이 못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안 된다, 불가능하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교육은 미래를 내다보는 교육이지만 정치나 행정은 당장의 현실을 바르게 보고 판단하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장록동에서 사고는 과속으로 달리다 커브를 꺽지 못해 발생하는 사고입니다. 그러나 고담동 사고는 과속과 신호를 지키지 않는 차량으로 흐름이 끊기지 않아 동네 주민이 이동을 할 수 없어 무리하게 길을 건너다 일어나는 사고입니다.
이 민원을 보고 안 되게 하려고 알아보고 앉아서 하신 탁상 민원 처리 결과인지 아니면 힘들어도 직접 현장에 다녀와서 동네 주민들의 이야기와 교통 흐름 등을 관찰하고 동네 주민의 입장에서 길을 서너 차례 건너보고 판단을 내리신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물론 격무로 시간이 없고 그 많은 민원 하나하나를 어찌 일일이 탐방하고 일을 처리하겠습니까. 하지만 멀리 서울에서도 관심을 갖고 내일 학생들의 지도를 위해 꿈꾸는 이 밤에 이런 일로 밤을 지샌다면 이 얼마나 서로를 힘들게 하는 일이고 맥빠지는 민원이 아니겠습니까?
거리로 인한 법규상 과속 카메라가 불가하다면 장록동에 있는 카메라를 옮기십시오. 카메라 설치비용보다 적게 들 것이며, 장록동은 이미 교통사고가 줄었습니다. 그리고 카메라는 적절히 이동하는 효과도 좋고, 민원을 들어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제가 힘좀 쓰는데 제가 옮겨 드릴까요.^^*)
민원을 올리고 며칠 후 사고가 발생했고, 제가 며칠 전에 갔을 때도 "교통사고 예방을 위한 가능한 방법을 모색한다는 데도" 여전히 [사고 많이 나는 곳]이거나 [속도를 줄이시오] [보행자 주의] 표지판조차도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무관심의 소치입니까?
또다시 무관심한다면 이천시청은 앞으로 일어나는 고담동의 교통사고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민원을 간과하고 사고예방을 소홀히 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다시 성의 없는 답변을 하시려면 아예 답변을 하지 말아 주세요. 무례했다면 용서하세요. 화가나니 논리적이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서울 서초동에서 신호현 올림
http://eminwon.icheon.go.kr/emwp/gov/mogaha/ntis/web/emwp/cns/action/EmwpCnslWebAction.do?method=selectCnslWebPage&menu_id=EMWPCnslWebInqL&jndinm=EmwpCnslWebEJB&methodnm=selectCnslWebPage&context=N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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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일컬어 '군자(君子)의 나라' 또는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고 불렀던 때가 있었다. 지금부터 약 2300년 전에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이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烈傳)]에 전해지는 말이다. 당시 중국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우리나라는 예절이 밝았다.
그 밝은 예절의 근간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우리 말에서 비록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말은 예로부터 시제표현과 높임의 표현이 잘 발달되어 있다. 물론 다른 유럽권 언어들을 살펴보아도 시제는 나름대로 잘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높임말은 우리말이 가장 잘 발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높임의 표현을 가르치기가 어려웠고 배우는 학생들도 어려워 했다. 우리가 독일어를 배울 때 관사를 배우려면 어려웠던 것처럼 잘 발달되어 있다는 것은 세분화되어 있는 것으로 상황에 맞게 정확히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말을 정확히 배우려면 그 상황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족성이 순수해서 남을 해칠 줄 모르고 남을 함부로 업신여기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을 것을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섞이지 않았다. 그래서 공자도 '그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동방예의지국'을 강조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나라가 그 순수성을 잃고 남을 함부로 여기며 먼저 가려 하고, 먼저 먹으려 하고,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싹틔웠을까? 그것은 아마도 우리말에서 높임의 표현이 사라져 가는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는 수백 번의 외침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물리쳐 그 역사를 이어왔다. 역사를 이어왔다는 것은 우리의 말도 이어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결정적으로 외침을 이겨내지 못하고 36년간이나 국권을 잃고 우리의 말과 글까지 빼앗기는 큰 아픔을 겪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는 일대 변혁을 겪게 된다. 양반들은 일제에 탄압의 대상이 되고 오히려 상민들이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말까지도 양반 중심의 문화에서 상민 중심의 문화로 흘러가게 되었다.
상대를 업신여기고 조롱하며 권세를 내세워 상대를 기만하고 약탈하는 말투는 정말 가난과 굴종에 찌들린 사람들의 말이었다. 말로 소외시키고, 말로 상대를 함부로 무시하고, 말로 상처를 주곤 한다. 그러고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네가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하지.'
그래서 우리나라 말에 존대어가 있으면서도 내가 먼저 존대어를 하면 웬지 내가 꿀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먼저 반말하고 먼저 무시하고 먼저 욕하려 든다. 저속한 상민 문화이기에 그런 자리에서 금방 드러난다. 심지어는 길을 가다 교통사고가 나도 먼저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야 상대가 기를 죽인다고 내리자 마자 욕을 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정말 교양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풍조가 직장에서도 벌어진다. 직장에서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반말로 함부로 말하고 그것이 친분의 표시인 양 아무도 책망하는 사람이 없다. 직위가 높을수록 나이가 많을수록 겸손해지는 미덕은 없다. 내가 직위가 높으면 당연히 나이가 많아도 아랫사람처럼 대한다. 나이가 많고 직장에 먼저 들어 왔다고 함부로 대한다. 마치 군대문화를 답습하는 것이다. 그래서 직장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라 내가 지지말아야 한다는 경쟁과 대립의 분위기로 간다.
이런 분위기는 자신도 모르게 가정에까지 가져 간다. 옛날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는 남편도 아내에게 존칭을 했다. 물론 상민의 가정에서는 안 그랬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남편도 아내에게, 아내도 남편에게 반말이다. 그러니 아이들도 부모한테 반말을 한다. 대중 방송에서도 아이들이 제 부모에게 반말이다. 상민 문화가 만연하니 우리말에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존칭어가 설 자리가 비좁아진다.
학교에서 매년 학년 초에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께 존댓말 쓰기 지도를 실시하고 약속이나 소감을 받아오라 교육한다. 그러면 대부분 부모들은 학교에서 가정교육까지 시켜주셔서 감사하단고 인사를 하나 간혹 아이들이 존댓말을 쓰니 어색하다며 그냥 반말을 쓰도록 두겠다는 부모들도 있다. 학교와 가정이 함께 노력하여 비뚤어진 언어문화를 바로잡아도 힘들 텐데 말이다.
요즘 아이들에게 '존대'나 '존경'의 의미를 물으면 엉뚱한 대답을 한다. '배려'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예의를 지키고 상대를 배려하는 일은 어색하고 귀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내가 낮아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와 달리 서로 존대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이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이 바로 존대어일 것이다.
문득 학창시절이 떠오른다. 언어학의 대가 강신항 교수님은 그 학식과 교양이 뛰어나 뵐 때마다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데 그 분은 오히려 학생인 우리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먼저 높임말로 대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게 대했으며, 늘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계셨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이 떠오른다. 길지 않은 인생 아옹다옹 다투지 않고 사랑하며 사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있어 상대를 향한 존대어가 첫걸음이지 않을까?
서울신문 교육칼럼(2010. 2. 23)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code=seoul&id=20100223016007&keyword=교육칼럼
<조선일보>http://forum.chosun.com/bbs.message.view.screen?bbs_id=1601&message_id=399228¤t_sequence=zzzzz~&start_sequ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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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고담동 마을 관통로의 교통사고
안녕하세요..
저는 이천에서 자라 서울에서 교직을 하고 있는 신호현입니다. 이천은 저의 고향이자 저의 자랑입니다. 부모 형제가 살고 있어 자주 내려가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이천의 발전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대로 농촌의 모습이었지만 하루 다르게 변화 발전하는 모습에서 고향은 아득히 꿈속 그리움으로 사라져가는 느낌입니다.
고향에 갈 때마다 안타까운 사건 소식을 듣는데 다름 아닌 고담동 마을길에 잦은 교통사고로 사망 또는 중상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3개월 전인 2009년 11월에는 작은아버님(신장균 씨)이 자동차에 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명절이라고 내려간 지난 2010년 1월에는 다시 이정수(고담동 거주) 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다쳐 중상으로 중환자실에 있다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지난 작은 아버님 사고 때는 경황이 없어 미처 민원을 올리지 못했고, 그 때 경찰관의 말로는 고담동에 과속방지턱을 설치해 줄 것이라고 말했기에 기다렸는데 다시 가 본 고담동엔 아무런 조치도 없었고 또다른 교통사고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는 시청 교통과나 경찰청에 대해 심히 상심하였습니다. 인명을 우선으로 해야할 교통정책이 누구하나 나서는 사람 없고 사고는 진행형으로 또다른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저는 고담동에서 작은집을 가거나 교회를 갈 때면 10분 이상 서 있어야 길을 건널 수 있습니다. 시속 60킬로 도로에 80킬로 이상의 속도로 끊임없이 달리는 차량들의 행렬이 끊어지길 기다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가 길을 건너지도 그리 어렵거늘 동네에 대부분 사람들이 어르신이고 몸이 불편하셔서 길을 건너는 길은 죽음을 건너는 만큼 어렵습니다.
위의 두 사건 외에도 2007년 경에 이은수 씨(고담동 거주)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완치가 안 되어 정상 활동이 불가하기에 요양원에 있습니다. 2005년 경에 방광호 씨(역시 고담동 거주)도 뇌를 다쳐 정상 활동이 불가하여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2002년 경에는 단월동에 사는 사람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고, 친척 동생도 10여년 경에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이 예들은 중상 이상의 사고들이고 다쳐서 부러지거나 하는 사고는 아주 빈번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천시 교통과에서나 경기도 경찰청에서는 그 흔한 "사고 많은 곳"이라는 간판 하나 없습니다. 동네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가 500미터나 되는데도 횡단보도는 세개 뿐이고 신호등은 하나 있는데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계속 이어지는 차량행렬을 끊어주는 곳이 없습니다. 동네 한 가운데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여 속도를 측정하면 거의 대부분의 차량이 과속으로 걸릴 것입니다.
언제까지 조용했던 마을 한 가운데서 죽고 죽이는 킬러 게임을 계속할런지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나몰라라 정책이 아닌 사람 살리는 교통정책을 펴주실 분이 누구 없나요? 많은 동네 사람들은 시장님께서 연두 순시 때 건의해서 해결해보겠다며 시장님의 배려를 기대해 본다지만, 이게 시장님 한 분의 힘만을 기대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저는 첫째, 우회도로를 건의합니다. 윗동네 단월동이나 아랫동네 장록동은 벌써 우회도로가 나서 그리 큰 사고가 없습니다. 단월동의 넓은 도로에서 달리던 차량들은 고당동 동네길에서도 당연히 달리는 것입니다. 우회도로는 고담동을 사람 죽이는 동네에서 사람 살리는 동네로 바꾸어줄 것입니다. 이는 예산이 많이 드는 문제이니 그동안 고담동에서 일어난 사고를 조사하여 경기도와 협의하여 해결하는 것입니다. 단월동에서 복하천 제방뚝을 타고 장록동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둘째, 과속카메라 설치입니다. 우회도로가 없는 고담동에 빈번한 과속을 잡기 위해서는 차선책으로 과속 방지 카메라를 설치하는 것입니다. 단월동에서 들어오는 횡단보도는 그 색깔도 지워져 흐리합니다. 횡단보도를 다시 긋고 과속신호위반카메라를 설치하면 카메라 앞에 차량들은 신호를 철처히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장록동에서 들어오는 신호등에도 과속신호위반카메라를 설치하면 차량의 흐름을 끊어줄 것이기에 마을 사람들이 길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과속방지턱입니다. 아주 소극적인 방법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면 이 방법이라도 반드시 써야 합니다. 과속 방지턱을 최소 2군데 설치하고 가짜 노란선 과속 주의선이라도 그려야 합니다. 혹자는 군사도로 문제로 가속 방지턱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하는데 분명 장록동에는 과속 방지턱과 신호등이 있습니다. 같은 지방도로인 백사면 가는 길에는 과속방지턱이 몇 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든 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설치되고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안 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어떤 이유나 근거를 들어서라도 설치 안하고 방치하여 사고는 계속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저는 교직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 늘 희망을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이 글을 읽고 어떤 힘을 써서 마을 어르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계신다면 적극적으로 힘을 써야 합니다. 세월은 빨라 베풀 수 있는 기회도 속절없이 지나게 마련이니까요?
고담동은 저의 고향이고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분들은 내 형제 친척 동향인입니다. 저도 3년 전에 바로 위에 형님을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인생이 교통사고만큼 속절없는 것이 또 있을까요? 한마디도 남기지 않고 영원한 이별을 한다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고통입니다. 그런 고통이 고담동에서는 자주 일어나고 있기에 이렇게 민원을 올립니다. 하루 빨리 죽음의 그늘을 거두어낼 크고 따스한 손길을 기대합니다.
2010년 2월 22일
서울에서 신호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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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회식에선 영화 한 편이 도마에 올랐다. 최근 개봉한 ‘브르스올마이티’라는 영화이다. 브르스는 승진에 탈락되는 등 인생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현실에 강한 불만을 품는다. 그러자 그는 현실을 이끌어가는 신에게 자살함으로서 적극적인 반항을 시도한다. 그 때 신이 나타나 신의 능력을 일주일 빌려주고 그로서 여러 가지 제멋대로의 삶을 추구하다 비로소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참 지혜를 발견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클럽활동을 마무리 하면서 여러 선생님들이 함께 관람을 했는데 회식자리에서 회자(膾炙)되었다. 영화를 보면서 미처 느끼지 못한 영화의 의미가 저마다의 평론으로 다시 살아왔다. 감상적인 비평론자들은 브르스의 손가락이 7개로 변할 때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랐다느니, 브르스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달을 끌어당겨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장면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브르스처럼 자신도 신의 능력을 빌렸으면 한다. 형식적인 비평론자들은 영화의 구성이 지루했다고 한다. 커다란 굴곡이 없이 코믹한 연출에 신경을 쓰느라 감동이 부족하다고 한다.
한 편의 영화가 회식자리에서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저마다의 삶에 어떤 감동을 불러오는가를 통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이나 삶의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이 같은 사회에서 함께 사는 우리가 삶을 나누며 공유하는 소재가 된다. 한 직장에서나 한 나라에서, 아니 작게는 한 가정에서 가족들이 공유하는 소재가 많을수록 그 가정은 이야깃거리가 많고 그 이야기를 통해 행복을 만들어 간다.
교과서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국민 공통의 정서를 형성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의 꽃이다. 나이가 많건 적건 한 자리에 앉아 교과서 속에 시를 외우고 소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배웠던 ‘큰바위 얼굴’이란 소설을 기억한다. 물론 그 소설은 나의 큰형도 배웠고 둘째형도 셋째형도 배웠다. 큰바위 얼굴에 주인공 어니스트는 큰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야말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온 위대한 인물임이 틀림없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큰바위 얼굴과 닮은 사람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돈을 많이 모아 부자가 되었던 ‘게더골드’나, 전쟁의 영웅이었던 ‘올드블러드앤썬더’ 장군이나, 정치적 명예를 얻었던 ‘올드스토니피즈’와 같은 인물이야말로 큰바위 얼굴과 닮은 인물이라 생각하고 한 때는 그들을 존중하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새로운 시인이 출현함으로서 시인이야말로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오히려 목사가 되어 진실하고 정직한 행실에서 우러나는 설교를 하는 어니스트야말로 큰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외친다.
이 소설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교과서적 소설이다. 나는 이 소설의 의미를 내가 배울 때는 몰랐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 살수록 가슴 저편에서 솟아나는 이 소설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느낌으로 다가오는 깨달음….
큰 형은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삶 속에서 계속되는 승진을 꿈꿨고 지금은 지역에서 알아주는 사람으로 명예를 얻었다. 둘째형은 군인이 되었고, 셋째형은 가난이 싫어 부자가 되겠다고 커다란 슈퍼맨(슈퍼 주인)이 되었다. 나는 목사가 되고 싶었으나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소설이 주는 의미가 내 인생에 큰 방향이 되었다.
우리 형제는 가끔 모이면 인생의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럴 때면 큰 형에게선 올드스토니피즈의 냄새가 나고 둘째형에게선 올드블러드앤썬더 장군의 냄새가 나고, 셋째형에게선 게더골드의 냄새가 난다. 그럼 난 세상의 그런 것은 다 필요 없고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아이들은 충실히 가르치고 인생을 한 편의 시로 읊는 것이 좋다고 한다. 내가 나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주인공 어니스트의 냄새인지도 모른다.
내가 선생이 되어 학생들에게 큰바위 얼굴이란 소설을 가르칠 때면 나는 힘이 마구 솟았다. 이 소설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시하는 것으로 한참 인생의 가치관을 세우는 청소년들에게 더 없이 값진 소설이라 생각했다. 물론 이 소설뿐만이 아니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그러하고, 폴 빌라드의 ‘이해의 선물’ 또한 그러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 소설의 참의미를 가슴으로 깨닫는 글들의 모음이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교과서는 시대와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물론 틀린 내용이나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을 그대로 가르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옛것은 구태의연(舊態依然)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무분별하게 교과서의 내용을 바꾸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다시 만들어진 7차 교육과정의 교과서 속에는 이런 소설들이 많이 바뀌었다. 이 소설들보다 교육적으로 더 중요한 소설들이 많이 들어갔다고는 하지만 왠지 반평생 몸에서 우러나는 인생의 의미를 힘주어 가르칠 가슴속 진실이 없어졌다. 새로운 교과서를 배운 아이들과 그 부모세대는 다시 단절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통된 대화를 찾기 힘든 것이다.
가정에서 아빠와 엄마가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낯선 내용들을 접하게 됨으로서 자녀와 학습 내용을 두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줄어든다. 사회 직장에서 선배가 후배에게 교과서 속에 인물을 비유하여 설명한다거나 학창시절 교과내용을 상기한다는 것은 이질감을 불러오는 요소가 되었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보이지 않게 교과서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 놓게 되는 것이다.
이번 7차 교육과정 속에 바뀐 국어 교과서는 한 마디로 너무 조잡한 느낌이다. 너무 많은 것을 제시하려다 보니 부분 발췌가 많이 들어갔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제시하다보니 가르침의 틀에 얽매일 우려가 있고 제시된 문항 자체는 구체적이지 못하고 포괄적이다. 인성 교육을 중시하다보니 국어교과서인지 도덕교과서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러니 교과서에 치중하려니 선생님은 가르친 내용이 없고 학생들은 배운 내용이 없는 느낌이다. 부족한 내용을 보충하려니 나름대로 준비하는 번거로움이 있고 가르쳐야할 내용이 더 많아진다. 교과서를 무시하자니 학생들과 학부모, 교육청, 교장님들이 불안하다. ‘왜 교과서를 안 가르치냐’고 물으면 대답하려는 노력이 변명이 된다.
교과서는 단지 기본만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가르치는 것은 교사의 몫이다. 교과서는 교사와 학생의 만남에 매개체(媒介體)이기 때문이다. 지적인 만남, 인성의 만남, 문학과의 만남 등 각 교과목마다의 목표를 향해 교사와 학생이 손잡고 달리게 하는 출발선이다. 교과서가 출발선이자 결승선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교과서로 하여금 모두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교사를 믿지 못하는 교과서는 이미 교과서가 아니다. 교과서로 교사를 바꾸려는 의도는 교과서를 조잡하게 한다. 기본만 제시되었다고 기본만 가르치는 교사는 없다.
교과서의 내용은 신중하게 선택되어야 하며, 한 번 선택된 내용은 대체로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지론(持論)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은 단지 학창시절에 시험을 치루기 위한 암기의 수단만은 아니다. 또한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의 그릇된 사고를 즉흥적으로 바꾸려는 인성지도 중심의 도덕 교과서처럼 되어서도 안 된다. 국어든 수학이든 영어든 교과서의 내용을 통해 평생을 배우는 인생의 표본(標本)이 되어야 한다. 교과서 속에서 ‘국민 공통 정서의 꽃’을 피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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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맘껏 세상
그래 맘껏 먹어라
맘껏 소리 질러라
맘껏 뛰어 보거라
친구들과 도란도란
밤샘 이야기도 나누고
한 담요로 영화도 보고
과자 음료도 먹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보따리 풀거라
선생님은 그저
너희들이 맘껏 뛰며 놀
어울릴 터전 만드는 것뿐
엄마 아빠 없이
삼층밥도 맛있다고
반찬 투정 안 하는 너희
밤샘 야영하며
스스로 일어서는 너희들아
맘껏 먹고 맘껏 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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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는 높임말과 낮춤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문법에서 높임말과 낮춤말만 있다고 분류를 해서 가르치기에 일반 대중들은 그렇게만 믿고 생활 속에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높임말이 아니면 낮춤말을 하는데 대개의 경우 낮춤말로 평준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낮춤말로 대화를 하고 그 속에서 남을 존중하는 분위기를 사라지고 상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문화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첫째, 높임말(존댓말)이죠. 이는 존대어나 '~습니다.'로 끝나는 말로 조부모나 부모, 동네 어른, 삼촌에게 쓰는 말입니다. 둘째, 예사말(평어)입니다. 이는 '반말+~요'의 형태로 끝나는 말로 낯모르는 언니나 오빠, 낯선 아랫사람에게 씁니다. 직장 동료나 아랫사람, 심지어는 부부지간에도 썼답니다. 셋째는 낮춤말(반말)입니다. 이는 '~어. ~니, ~라'의 형태로 끝나는 말로 잘 아는 동생이나 후배들에게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말이 함부로 쓰입니다. 여기저기 낮춤말이 난무합니다. 대중문화를 선도하는 TV에서조차 자녀들이 제 부모에게 낮춤말(반말)을 사용합니다. 높임말을 써야할 때 예사말을 쓰거나, 예사말을 써야할 때 낮춤말을 쓰는 경우는 친근감이 형성되었을 때는 가능합니다. 예를들어 부모와 자식이 친근할 때는 높임말에서 예사말을 쓸 수 있습니다. 언니나 오빠 가 친근할 때는 예사말에서 낮춤말을 쓸 수 있습니다.
언젠가 교육부 공문으로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높임말을 쓰라고 지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몇몇 젊은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십시오, ~습니다'의 높임말을 쓰는 것을 보고 어찌나 당황스러웠는지. 교육부에서는 예사말 '~요'가 현재 높임말로 분류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쓰라는 뜻인데 분류가 잘못되었으니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잘못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한 예로 어느 군부대에서는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높임말을 쓴다고 기사화 되었다. 후임병을 존중하는 뜻에서 부대장의 지시로 높임말을 쓰라고 했다는데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 아닌가.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김 일병님, 진지 잡수십시오.'라고 한다면 정말 잘못된 말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니 후임병에게 예사말을 쓰라고 지시했어야 한다.
예사말은 자식이 부모에게, 직장 동료간에, 낯모르는 아랫사람에게 두루 사용하는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더 나아가서는 부부간이거나 스승이 제자들에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고, 부모가 자식에게도, 어른이 어린이에게도, 선임병이 후임병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학부모들이 가끔 “우리 집 아이는 어른들에게 높임말보다는 주로 반말을 사용합니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예뻐보였는데 이제는 제 주장대로만 하고 엄마를 무시하고 대드는 모습을 볼 때 속상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높임말을 하도록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요?”라고 질문을 하곤 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높임말을 쓰도록 자녀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높임말 속에는 존경의 마음이 담겨져 있어서 어른에 대해 존경하는 습관을 갖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기 부모에게 높임말을 쓰면서 자란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어도 부모에게 반항하는 일이 좀처럼 생겨나질 않습니다.
그러나 반말하는 아이들에게 단번에 높임말을 쓰라고 지도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니 먼저 예사말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예사말의 습관을 넣어주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먼저 자녀들에게 예사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 밥먹어~요.' '공부하느라 힘들지~요.' 물론 권위주의적 사고에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씨에서 나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양반의 가문에서는 가정에서 부부가 서로 예사말을 사용했습니다. 평민이나 상민들이나 반말을 하고 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를 빼앗기고 말조차 빼앗긴 일제시대부터는 말의 높낮이도 사라져 하향 평준화가 된 탓인지 부부간에도 자녀에게도 제자들에게도 모두 반말의 문화가 배어 일반화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자녀가 부모에게 반말로 지껄이는 모습을 공공연히 방송을 해대고 이를 바로잡을 사람 하나 나서지 않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를 낮추면서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밖으로 우러나와 표출되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말이고 인사입니다. 때와 상황에 맞는 말로 자녀들이나 제자들을 가르쳐야 올바른 부모로, 스승으로 존경받을 것입니다. 모든 것 아끼지 않으면서 키워놓고 자식에게 무시당하는 부모, 열심히 가르치고 뒤에서 욕을 먹는 선생님. 그 많은 지식보다 소중하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한 가지 말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 말이 바로 국어책에도 없는 예사말입니다.
http://club.hankooki.com/talkbox/bbs/wwwboardview.php?&tablename=clubboard&exe=write&mode=&indexid=72935&page
=0&no=&cat=20&menu=&report=&query=&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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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 섬 욕지도 천왕봉 오르니
절색비경 다도해 병풍 펼쳐지네
갇혔던 해안 아득하게 멀어지니
가까운 하늘이 천국인가 하노라
깊은 산 찔레꽃 아름답다더냐
보아주는 마음이 아름다운 거지
하늘 흰 구름 화려하려 했다더냐
찬란히 우러른 마음이 고운 게지
연두빛 다도해 저리 아름다운 건
외로운 섬들마다 손잡은 탓이요
인간들이 모여 그토록 아름다운 건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는 탓이리라
여보게나 사는 일에 바쁜 친구들아
세상에서 높다고 낮은 이 무시 말고
도시에서 삭막하다 파도 잊지 말게나
어울려 도란도란 어깨동무 살아보세
詩 원 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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