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일반계고만 고집하십니까?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중3 학생과 학부모들은 고심에 빠졌다. 아이가 공부를 잘해주면 좋겠는데 그다지 잘하지도 못하고 열심히 노력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본인도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장래 희망도 명확하지 못하다. 장래희망이나 적성을 물으면 그냥 신통치 않은 대답에 물어본 부모가 더 속이 터진다.

 

   공연히 남들은 자식이 특목고에 갔다느니 일반계고 갔다느니 내비치고 조금 더 있으면 어느 명문대학을 들어갔다느니, 장학금을 받았다느니 은근히 자랑을 해대는데 우리 자식은 신통치가 못하다. 입시나 진학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막히는 기분이다. 그래서 '엄친아'라는 말도 생겼다. 엄마 친구의 아들은 특목고도 들어가고 명문대학에도 잘 들어가는데 우리 자식만 속썩이는 것이다.

 

   어느덧 우리 여동생도 큰 딸이 공부를 중간 정도 하였는데 동생이 고집하여 일반계고를 보내어 공부를 시키느라 죽을 뻔하였다. 매일 학원에 보내어 부족한 과목을 보충시켰지만 남들은 선행학습을 시키기에 따라가지 못했다. 방학 동안에는 돈을 수백 만원 들여 기숙형 학원에 한두 달씩 보내기도 했다.

 

   그 아이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한다고는 하지만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자 스스로의 스트레스가 심했다. 가족들 휴가에 가지도 못하고 명절 때 친척들 모임에도 얼굴을 비추기 꺼렸다. 스트레스 쌓일 때마다 먹어대니 몸은 날로 불었다. 고3 엄마 노릇하느라 큰 딸을 챙겨주지만 저도 힘든지 왕짜증이다. 그러더니 이번 대입에 지방대 수시에 넣었는데 합격여부는 아직 미정이다.

 

   그 동생의 둘째딸이 이번에 중3으로 고입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역시 본인은 무엇을 잘하는지 무엇을 하면서 살고 싶은지 불확실하다. 성적은 중간이다. 본인은 일반계고 가려니 언니가 고생하여 공부를 해도 지방대에나 갈둥말둥하니 걱정이 된단다. 자신이 없단다. 그래서 난 적성과 장래희망이 일치한다면 실업계를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아이도 실업계를 생각했지만 엄마의 반대가 심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인 여동생에게 우리 자랄 때와는 다른 실업계의 특성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자랄 때는 공부를 잘하면 일반계고를 가고 공부를 못하면 실업계를 가서 일반계에나 가야 대학을 가고 실업계에서는 대학 가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실업계 과목 공부를 하면서 일반계고 공부를 진학반이라 하여 거의 독학하다시피 해서 대학을 갔다. 그리고 취업의 정도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래서 실업계 다니는 학생들은 인발계고 학생들을 부러워했고 그 부모들도 일반계 다니는 자녀들을 은근히 자랑했다.

 

   물론 공부를 잘한다면 특목고를 가거나 자립형, 자율형 사립고를 가거나 일반계고 가더라도 상관없지만 공부를 중간 정도 하는 학생의 선택이 가장 어렵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주 상위권 학생은 특목고를 가고 특목고에 가지 않은 학생들은 대개 일반계고를 가고 그보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은 실업계를 갔다. 그러니 중간 정도의 학생들은 대개 일반계고를 가서 열심히 도전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요즘 진학의 판도가 달라졌다. 실업계고에서 미달 사태가 벌어지니 실업계고를 살리는 차원에서 대입 특별 전형에서 실업계 학생을 3% 정원 외로 선발하더니 2005년부터는 5%로 확대하여 실업게 학생들에게 특혜를 주었다. 그러니 서울 4년제 대학만도 5,0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혜택을 보게 되었고 공부 못해서 실업계 간 학생들은 버젓이 서울 4년제 대학에 들어가고 공부 잘 한다고 일반계고 간 학생들은 지방대나 전문계 대학으로 들어갔다.

 

   요즘은 실업계고 명칭은 전문계고로 바꾸고 많은 실업계고가 특성화고로 탈바꿈하였다. 특성화고등학교는 학교 능력에 맞는 한 가지를 선택하여 특성화고로 변모하여 우수 학생들을 유치하니 정평이 난 학교는  내신 20%이내에서 끊어질 정도로 지원이 우세하다. 대개는 내신 50% 이내에서 입학생을 선발하여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만 모아 수업을 하니 수업분위기도 좋다고 한다.

 

   이제 50% 이상의 학생들이 설 곳이 없어졌다. 아직 특성화고로 변모하지 못한 전문계고를 선택하든지 그냥 밀려서 일반계고를 가야할 형편이다. 밀려서 일반계고 간다는 것은 일반계고 우수학생들의 들러리나 서겠다는 뜻이다. 그나마 수준이 낮은 전문계고에 가서 내신 성적이라도 올리면 정원외 입학이 가능하다.

 

   하지만 50% 이상의 학생들이 부모의 잘못된 선택으로 일반계고를 가기도 한다. 현재 일반계고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과 거의 바닥이 아이들이 모여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하니 수업 분위기가 엉망이다. 공부를 애써 열심히 하려는 학생들과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섞여 공부를 하고 있다. 이제 일반계고를 가는 학생들은 다시 한 번 신중히 고민을 해봐야 한다.

 

   참고로 5,6년 전에 아주 형편없는 실업계를 갔던 학생이 지금은 중앙대나 경희대를 다니고 있다. 중앙대는 시각디자인과이고 경희대는 영문과를 다니고 있다. 둘 다 실업계고에서 내신 상위 등급이었고 시각디자인 학생은 그 쪽으로 실기 능력이 있었고, 영문과 학생은 외국에서 거주하다 온 학생으로 영어말하기대회 등에서 수상 경력이 있었다. 

 

   이제 정시 44% 수시 56%의 대입 선발에서는 무엇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무엇을 잘하느냐가 중요하다. 학생의 적성과 소질을 조기에 계발해 주고 꾸준히 실력을 쌓아가는 것도 중요하다. 지금 대학 도서관에 가면 명문대학을 나오고도 취업을 못해 재학생보다 취업 재수생들이 많은데 대부분 인문학 계열의 학생들이 많다.

 

   중3인 내신 50% 이상의 학생을 지금 전문계고를 보내야 좋을지 일반계고를 보내야 좋을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학생의 선택이 중요하고 학생의 관심과 적성 그리고 소질이 중요하다. 장래 희망도 중요하다. 신중히 선택해야 하겠지만 옛날 사고방식 그대로 일반계고만 가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학부모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아직도 일반계고만 고집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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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성한 삶과 아름다운 대인관계를 위하여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어떠한 사람도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신이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당신은 불행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자신의 판단이 옳으며 다른 이들은 다 잘못되었으며 그러므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쉽게 언제 어디서나 비난을 입에다 달고 산다. 나는 당신이 그러한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것은 정말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혼자 TV를 보면서 온갖 욕을 퍼붓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것 은 참 희한한 일이다. TV의 내용이 보기 싫으면 보지 않으면 될텐데 굳이 그것을 보면서 불평과 비난을 퍼붓는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아는 분이 위장을 수술한 적이 있었다. 수술이 성공적이어서 이분은 회복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이 분이 병실에서 TV의 정치 뉴스를 보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화가 나서 마구 비난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정치인이 선거에 떨어진 것을 보고 화가 잔뜩 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직후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수술한 부위에 통증이 커졌다. 의사는 그 상태를 보고 할 수 없이 다시 재수술을 했다. 수술이 잘 되었는데 참 이상하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다시 수술을 했다.
  수술을 마치고 의사선생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밸(창자)이 꼬였어요. 의사 생활 30년에 이렇게 밸이 꼬인 것은 처음 봤습니다. 참 이상하네요. 처음에 수술했을 때는 아주 정상이었는데.."


  나는 의사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말, 밸이 꼬인다는 말이 정말 사실인 것을 알았다. 흔히 화가 나면 밸이 꼬인다, 밸이 꼬여서 못 살겠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대로 화를 내고 비난을 퍼부으면 창자가 꼬이게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부디 비난을 하지 말라. 당신의 위장과 창자가 무사하고 건강할 수 있도록 말이다.

 

  비난은 어떤 효과가 있는가? 거기에는 아무런 긍정적인 효과도 없다. 그것은 오직 영혼을 파괴할 뿐이다. 그것은 오직 사람에게 해만 끼치게 된다.


  사랑의 권면과 비난은 다르다. 또한 자신이 아무리 사랑의 권면이라고 생각해도 상대방이 비난이라고 느끼면 그것은 비난이다. 설사 의도가 잘못 전달되었다고 해도 그 책임은 전달자에게 있다.


  당신의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가? 그들이 당신을 그리워하고 보고싶어 하는가? 아니면 당신은 혼자이며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는가? 자기들은 서로 즐거워하면서 나에게는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고 느끼는가? 그래서 고독하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당신이 그러한 상황에 있다면 당신 자신을 돌아보기를 바란다. 나는 비난하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내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비난이란 영의 문제이다. 그것은 공격적인 영이다. 그래서 그 비난이 배어있는 사람은 날카로운 칼을 쥐고 있는 사람과 같다. 그들의 말에는 심판과 공격과 예리한 가시가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다.
  누가 자기를 찌르는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어느 누가 아프게 찔리며 고통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겠는가? 억지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와 같이 있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물질과 권세가 있지 않은 한 사람들은 그의 곁에서 버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 유명한 시사 칼럼니스트의 글들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들의 글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었다. 우선 충분히 논리적이며 예리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속시원하게 긁어주는 면이 있었다.
  반대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을 충분하고 통렬한 논리와 근거를 제시하며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같은 비슷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통쾌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찔리는 사람들의 입장은 어떠할까? 그와 반대되는 입장이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은 어떻게 느낄까? 자신의 행동이나 입장에 대해서 반성하고 깨닫게 될까? 그러한 글들을 통해서?
  그러한 글들은 겉으로는 아주 예의바른 척을 하고 있었다. 존칭도 사용하며 상대방을 생각해주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겉모습의 예의는 사실 일종의 조롱같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치레는 아닌 것이다.

 

  그러한 글들은 과연 사람을 바꿀 수 있는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공격을 당하는 당사자들은 언젠가는 두고 보자고 이를 악물 것이다. 그러한 글의 밑에 달리는 덧글들을 보면 입장의 차이에 따라서 거의 저주 수준의 글들이 서로를 향하여 퍼부어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옳은 말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아무리 비난이 섞여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이 옳다면 그것은 가치가 있는 글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논리와 근거로 무장하고 설득력이 있는 글이나 말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오직 아프기만 할 뿐이다. 사람은 때리고 찔러서 변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악을 대적하는 것, 악을 비난하고 드러내는 것 - 그것은 악을 소멸하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악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무례한 사람을 때리면 그가 깨닫고 자상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아주 인색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많이 얻어맞은 후에 아주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질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어둠은 어둠에게 빛을 줄 수 없다. 오직 빛이 빛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이다.


  악을 비난하는 것은 악을 더욱 강하게 한다. 그것은 악을 더 일으킨다. 반발하게 만들고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악은 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통해서 없어지는 것이지 비난하고 개혁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악한 사람을 비난할 때 비난을 받는 이들은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괴롭다.


  그들은 아프기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비난하는 자를 공격하게 된다. 그래서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니 남을 몰아세우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그 전쟁이 좋은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위선자들이 많다. 그러나 굳이 그들의 위선을 벗겨내려고 하지 말라. 주님이 시키시는 일이 아닌한 그러한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 그것은 그들의 선택한 그들의 인생이다.


  굳이 그들과 원수를 맺지 말라.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으로 그들의 악을 없애지 못한다. 그것은 악을 증폭시킬 뿐이다. 할 수 있는 한 악과 싸우는 것보다, 어둠과 싸우는 것보다 빛을 경험하고 빛을 공급하는 통로가 될 수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예의바르면서 할 말은 다 하는 사람들. 그들은 얄미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랑 받는가? 사랑 받지 못한다. 그것은 억울한 일인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다른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말속에 가시가 있는 것도 좋지 않다. 말에는 순수함이 있어야 한다.


  당신이 똑똑하고 영리하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억울해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사람들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사람보다 무식하고 부족해도, 그가 언어가 어눌한 사람이라고 해도 따뜻하고 포근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당신이 아주 날카로운 사람이라고 하자. 하지만 당신도 외롭고 힘들 때에 당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그리울 것이다. 당신의 결점과 약한 부분을 날카롭게 메스를 가하며 정확하게 지적하는 사람을 별로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지쳐서 조금 위로를 받으러 갔을 때 온갖 교훈과 설교를 늘어놓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가지 않을 것이다. 한번은 갔을지 모르지만 혹을 떼러 갔다가 혹을 붙여왔다고 상대방의 무정함을 서운해하며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가지 않을 것이다. 당신에게도 필요한 것은 날카로운 사람이 아니라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일 것이다.
    
  비난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당신의 영혼에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이 어둡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과 영혼이 어두워서 온갖 나쁜 것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의 결점과 약점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을 다 들여다보고 아시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것일까?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아름답게 보시며 사랑스럽게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주님의 눈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태양을 통하여 아름다운 햇살을 보내시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고속도로를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따라 모든 사람들이 차선을 거꾸로 달리는 것이 아닌가! 그는 몇 번이나 정면에서 오는 차들과 충돌할 뻔하면서 아슬아슬하게 차를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핸드폰이 찌르릉하고 울렸다. 그것은 그의 집에서 아내가 한 전화였다. 아내는 말했다.
  "여보! 조심하세요! 지금 TV를 보고 있는 데 당신이 가고 있는 고속도로에서 어떤 미친 사람 하나가 고속도로에서 거꾸로 달리고 있어요."


  이 남자는 급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지금 미친 놈이 하나 둘이 아니야! 위험하니까 얼른 전화 끊어!"

  물론 우스개 이야기다. 다만 이 메시지를 나누고 싶은 것이다. 당신의 눈에 모든 사람이 나빠 보이고 모든 상황이 잘못되어 보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짓이 답답해 보인다면 지금 당신은 혼자서 고속도로를 거꾸로 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당신의 눈이 잘못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비난은 악의 힘을 강하게 한다. 그것은 오히려 악을 더 일으킨다.
  선지자들은 악을 소멸하지 못했다. 주님이 직접 오셔서 자신이 죄를 위해서 직접 죽으심을 통해서 대가를 지불하셨고 비로소 사람들이 빛의 세계, 천국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주님이 시키시지 않는 선지자 노릇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비난은 악한 사람을 더욱 망친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스스로 악을 창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악의 통로가 되며 악의 전파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어두운 시각과 시선은 결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도 비판은 당신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당신은 더욱 더 허무해질 것이다. 외롭게 될 것이다. 절망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심령의 깊은 곳에서 결코 만족과 행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비난은 나도 남도 아무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진정한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사랑에서 온다. 그것은 웅변이나 논리적인 타당성이나 지혜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을 어여삐 여기는 애정에서 온다. 


  어떠한 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약하다. 공격하는 사람 앞에서는 모두가 자신을 방어하지만 자신을 진정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권위가 없다. 우리는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러나 누군가가 너무나 사랑스러우며 상대방도 그것을 알고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야단을 쳐도 거기에는 권위가 있다. 그래도 상대방은 그 야단이 아프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지치고 외롭고 피곤한 것은 진리의 말씀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지혜와 옳은 이야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저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날은 춥고 모든 사람이 따뜻한 언어와 따뜻한 가슴속에서 안식하고 싶어한다. 사랑과 받아줌 외에는 안식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날카롭고 정확한 말이 아니라 애정에 굶주려 있는 것이다.

 

  당신은 남들이 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떤 사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이 악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당신에게는 아름답게 보이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를 도울 수 있다. 당신은 그를 변화시킬 수 있다. 당신은 그에게 어떤 권위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을 보는데 아주 나쁘고 악하게 보인다면? 당신은 그를 파괴하는 도구로 쓰이게 된다. 당신이 입을 벌릴수록 그에게 직접 말하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그에 대해서 나쁘게 말하든지 아무튼 그 사람은 점점 더 악해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다면 부디 당신의 입을 벌리지 말라. 그리고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라. 어느 날 주님이 당신에게 임하시고 당신의 기도가 응답이 된다면 당신은 갑자기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무엇인가 말하게 되고 이상하게도 상대방은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부디 그 사랑의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라. 아직도 사람들의 잘못이 보인다면 당신의 눈을 수술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라. 변화는 항상 당신 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위하여 아무에게도 비난을 퍼붓지 말라. 아무도 정죄하지 말라. 자신도 정죄하지 말며 그 누구의 탓도 하지 말라. 정죄란 지옥에서 오는 것이며 주님은 아무도 정죄하지 않으신다.

 

  모든 사람은 악하고 나쁘지 않다. 그저 바보 같고 슬프고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치유가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떤 이들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은 주님의 시간에 달려있다.


  받을 수 있는 이들에게 사랑을 주라.
  받을 수 없는 이들은 주님께 맡기고 기다려라.
  당신은 그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으며
  아무도 거부하지 않으며
  오직 사랑의 통로만이 될 수 있을 때
  당신의 영혼은 이 땅에서도 천국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2에서>

 

 

글쓴이 : 정원목사님

출처 : 새생명 New Life Church
글쓴이 : 어노인팅 원글보기
메모 :
아 이 들

- 詩 신호현

아이들은
그대로가 금쪽 텃밭

인사를 심으면
열 배의 인사가 자라고
사랑을 심으면
백 배의 사랑이 자라는

노래의 씨 뿌리면
아름다운 성악가로 자라고
웃음을 던져 주면
웃음꾼 되어 찾아오는

넓고 푸른 들판
거름을 주지 않아도
물을 뿌리지 않아도
언제나 풍성한계절

그대로가 금쪽 텃밭인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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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아이들은

그대로가 금쪽 텃밭

 

인사를 심으면

열 배의 인사가 자라고

사랑을 심으면

백 배의 사랑이 자라는

 

노래의 씨 뿌리면

아름다운 성악가로 자라고

웃음을 던져 주면

웃음꾼 되어 찾아오는

 

넓고 푸른 들판

거름을 주지 않아도

물을 뿌리지 않아도

언제나 풍성한 계절

 

그대로가 금쪽 텃밭인

아이들

 

21세기 원시인 신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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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시>>

 

빛의 날개로 솟구쳐라

 

                시인 신 호 현

 

날마다 저녁에 진 태양은

하룻밤을 잠들고 다시 뜨지만

해마다 세모(歲暮)에 진 태양은

풀무 목욕하고 새로 태어나니라

 

여보게 그대들이여

지난날의 아픔 간직했는가

서러운 한(恨) 가슴에 품었는가

아픈 상처로 태산 넘기 힘드니

새 구름으로 감싸고 동여매자

 

새 희망의 태양은

불의(不義) 앞에 꺾이지 않으리니

민족의 얼을 주섬주섬 이어 엮어

활활 타는 모닥불을 지펴보자

 

한반도 어디를 누워도

정겨운 내 땅 내 님인 것을

낯선 이도 알고 보면 이웃인 것을

그대 아는가 모르는가

 

여보게 친구들아

우리 한 번 사랑으로 살아보자

이웃의 눈물을 웃음으로 바꿔보자

넘어진 친구 일으켜 어깨동무 달려보자

 

아! 개짓는 소리가 들린다

그대 어둠의 눈빛을 거둬라

그대 절망의 눈물을 거둬라

이제 새로운 태양이 솟아올랐다

새 역사의 무대가 열렸다

 

산들아 푸르른 들아

미물 잡초도 모든 생명들도

새 태양 받아 춤을 추거라

새 하늘 향해 움추린 날개를 펴라

 

치유되지 않은 그늘이

그대를 힘들게 하더라도

찬란한 빛이 어둠을 이기듯이

그대 빛의 날개로 솟구쳐라

 

 

 

빛의 날개로 솟구쳐라(詩 신호현 낭송 신영애 음악 김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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